흐트러짐 없이 쭉 뻗은 발차기에선, 절제된 힘을 바탕으로 한 균형미가 엿보인다. 최규섭 기자얼핏 가녀려 보인다. 자그마한 얼굴과 적은 말수는 더욱 그런 느낌을 자아낸다. 표정마저 별다른 변화가 없다. 영락없이 수줍음 많은 소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깜짝 놀란다. 코트에 들어서서 펼치는 연기엔, 힘이 배어 있다. 절제된 힘과 어우러진 균형미가 빚어내는, 역동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몸놀림에, 절로 감탄사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태권도 기술체계 가운데 으뜸인 품새의 참모습을 확연히 깨닫게 하는 완벽한 동작이다.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패배를 모르는 질주 앞에서, 어찌 태연할 수 있겠는가. 무적 가도를 내달리는 '품새 소녀' 김주하(둔촌고등학교 2학년)다.
올 시즌 3관왕이다. 출전한 3개 대회에서 모두 정상에 오르는 맹렬한 기염을 토했다.
고교 무대에 선보인 지난 시즌까지 외연을 넓히면 더 대단하다. 출전 4개 대회 연속 우승의 절정 기세를 뽐냈다.
201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엄청나다. 8개 대회 연속 우승과 함께 10관왕에 오르는 경이적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 지난해부터 출전 4개 대회 연속 우승한 '품새 소녀'
지난 9월 초 태백에서 열린 제32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기 품새 대회 3인조 단체전에서, 김주하(뒤쪽)는 아름찬 코리아를 정상으로 이끌었다. 아름찬 코리아 제공지난 9월 초, 김주하는 다시 한번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태백 고원체육관에서 열린 제32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기(3~4일) 대회에서, 안혜지·유서영과 짝을 이뤄 아름찬 코리아를 (3인조) 단체전 정상으로 이끌었다.
지난해 이 대회 개인전에서 우승했던 김주하는 2연패의 감격을 누리며 기쁨을 만끽했다. 중학교 시절까지 포함하면 3연패에 빛나는 값진 기록이다.
올 대회에선, 한 종목에만 출전할 수 있는 제한 규정에 묶여 단체전에만 나가 '어김없이' 우승 과실을 땄다.
지난해부터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질주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의 엄습으로 말미암아, 단 한 차례 출전할 수 있었던 제31회 문체부 장관기를 시작으로 결코 꺾일 줄 모르는 상승세다.
활화산처럼 용솟음친 기세는 올 시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제31회 용인대학교 총장기 대회(5월·철원)와 제18회 대한민국태권도협회 회장배 선수권 대회(6월·태백)에서 잇달아 개인전 우승을 휩쓸었다.
김주하는 10월 대단원을 장식하려 한다. 제102회 전국 체육대회(8~14일·경상북도 일원)에서 금빛을 수놓으며 마지막 한 점을 화려하게 찍으려 벼르고 있다.
서울시 대표로 발탁된 김주하가 겨냥한 과녁은 '당연히' 개인전 우승이다.
◇ '품새 소녀', '태극 품새 소녀'로 변신할 그 날 꿈꿔
꾹 다문 입에선, 금방이라도 우렁찬 고함이 터져 나올 듯하다. 최규섭 기자김주하는 일찌감치 태권도를 접했다.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때, 태권도복을 입은 이웃집 오빠가 멋있어 보여 부모(김민후-이현진 씨)를 졸라 태권도장의 문을 두르렸다. 첫 둥지는 남양주시 화도읍에 자리한 경희대 송라태권도장이었다.
초등학교(화도) 때부터 품새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초교 3~4학년 시절 이미 전국 무대에서 곧잘 1위(중학년부)에 오르며 이름을 알렸다. 또, 각부(중·고학년) 메달리스트들이 각축을 펼치는 왕중왕전에서 2위를 차지하며 꿈나무로 기대를 모았다.
처음엔 시범 분야 진출을 꿈꿨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태권도 시범단인 케이-타이거즈(K-TIGERS) 입단을 목표로 참 열심히 노력했어요. 그러나 적성이 맞지 않음을 깨닫고 6학년 때부터 오로지 품새에 매달렸죠."
품새 외곬의 길에 들어서며 둥지를 옮겼다. 품새 전문 지도자로 이름 높은 허승재 아름찬 코리아 관장 문하로 들어갔다.
"일요일을 빼곤 매일 집이 있는 남양주와 도장이 자리한 서울을 오가며 품새를 수련했습니다."
기술적 측면에서, 품새는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규정된 틀(型·형)에 맞춰 스스로 수련할 수 있도록 공방 원리를 나타낸 행동 양식이다. 곧, 자신과 벌이는 고독한 싸움에서 이겨야만 대성할 수 있다.
김주하는 싫증 내지 않고 견뎌 냈다. 나어린 소녀에겐 힘겨운 매일매일의 담금질을 소화했다. 하루 100㎞에 가까운 강행군의 여정도 거뜬하게 이겨 냈다.
"어쩌면 싫증 낼 겨를도 없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순서에 따라 정해진 동작과 자세를 능숙하게 펼칠 수 있도록 익히면서 품새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죠."
열과 성을 다한 훈련은 곧 성과로 나타났다. 중학교(천마)에 올라간 첫해인 2017년, 우석대학교 총장기 대회(7월)에서 여중 1학년부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4월에 잇달아 열린 한국체육대학교 총장배와 상지대학교 총장배에서 거푸 우승 문턱에서 물러서는(2위) 쓰라림을 겪은 끝에 일군 개가였다.
이듬해엔, 다소 슬럼프 기미를 띠었다. 정상권에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단 한 차례도 우승의 단맛을 보지 못했다. 2018 김운용컵 국제 오픈 대회를 위시해 네 차례나 3위에 그치는 불운을 겪었다. 한국여성태권도연맹 회장기 대회에서 2위에 오른 전적이 가장 나은 성과였다.
2019년, 김주하는 꽃을 활짝 피웠다. 4월에 열린 상지대학교 총장배를 시작으로 6관왕에 올랐다. 5월 계명대학교 총장배→ 6월 나사렛대학교 총장배와 우석대학교 총장배→ 7월 여성연맹 회장배→ 8월 문체부 장관기로 이어진 '우승 드라마'의 서막이었다.
지난 6월 태백에서 열린 제18회 대한민국태권도협회 회장배 품새 선수권 대회 여고 2학년부 개인전에서 우승한 김주하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상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아름찬 코리아 제공김주하는 이처럼 화려한 발자취를 쌓아 가는 원동력으로 부모와 스승의 보살핌을 주저 없이 손꼽았다.
"정성을 다해 키워 주신 부모님의 은혜는 그 깊이와 크기를 이루 말로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신 관장님은 제가 앞으로도 잊을 수 없는 스승님이시죠.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잘못된 동작을 놓치지 않고 잡아냄은 물론 바로잡을 때까지 세밀하게 가르쳐 주세요. 좋은 지도법과 아름찬 코리아의 가족 같은 훈련 분위기가 어우러진 덕분에, 나날이 실력이 늘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평일엔 오후 세 시간, 토요일엔 세 시간씩 두 차례 각각 훈련한다. 학업 또한 게을리할 수 없어, 평일엔 오후 5시 반부터 훈련을 진행한다.
김주하는 자신의 장단점도 솔직하게 밝혔다.
"선천적으로, 유연성이 뛰어난 점이 큰 자산이에요. '팔다리가 길어 동작이 예뻐 보인다.'는 평가를 받곤 하는데, 저 자신도 강점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연기는 아쉽고 불만입니다. 그래서 이 단점을 극복하는 훈련에, 땀을 흘리고 있죠."
허승재 관장의 제자 평가에선,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과 넘치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훈련 강도와 상관없이 묵묵히 수련에 임한다. 주하처럼 말없이 잠잠하게 훈련을 소화할 때, 선수 생명이 길어짐은 당연한 귀결이다. 기술적으로 완벽하다. 단지 안타깝다면 체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이를 보완키 위해 하체 강화 훈련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김주하의 꿈은 국가대표다. 2020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3위로 아쉽게 태극 티켓을 눈앞에서 놓쳤다.
"2년 만에 열리는 (2022)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선, 꼭 국가대표로 뽑히고 싶어요. 간절한 바람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려 합니다."
'품새 소녀'가 '태극 품새 소녀'가 될 날은 머지않은 듯하다. 올 시즌 무풍지대를 달려온 줄기찬 기세에 다부진 마음가짐까지 어우러졌으니, '장밋빛 꿈'은 반드시 이뤄지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