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HISTORY]'독침주먹'·前 WBC 슈퍼라이트급 챔프 김상현, 500g의 '희비'

1955년 부유한 집 외아들로 부산서 태어나 험난한 복서의 길 선택
무앙수린(태국) 잡고 부산 출신으로는 최초로 세계 챔피언에 올라
김용강 등 후진 양성도 접고 현재는 개인사업에 열중

김상현은 1955년 3월 부산에서 윤택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영남 중학 2학년 때 이종언 관장이 운영하는 아세아체육관에서 처음 글러브를 꼈다.

본격적으로 복서의 길을 나선 것은 부산 동의공고 졸업반인 1972년, 제53회 전국체육대회 LM급에 부산 대표로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하면서부터다.

타이틀전을 앞두고 공개 스파링을 하는 김상현(사진 오른쪽). 조영섭 제공

이듬해인 1973년 9월 프로에 데뷔해 176cm의 큰 키에서 뿜어내는 카운터를 주무기로 7연승(3KO)을 거두며 초반부터 주목을 받았다.

1974년 12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1년 테헤란 아시아선수권(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인 관록의 정영근(중산체)을 만나 무승부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연승에 제동이 걸렸다.

이후 1975년 WBA jr 라이트급 챔피언 벤 빌라폴로와 타이틀전을 앞둔 김현치의 스파링 파트너로 발탁된 김상현은 그와 스파링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1975년 2월 신인왕전 우승자인 4전 4KO승의 유기연을 2회 28초 만에 KO승로 꺾고
최만성. 김광선, 박동안. 김갑수 등 국내 톱 복서들에게도 연승을 거둬 유망주 반열에 올랐다.

강한 선수와 계속된 라이벌전은 김상현의 경기력을 계속 끌어올려 국내 선수와 맞선 23차례 대결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은 기록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해외 원정경기는 달랐다.

1977년 1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친 인도네시아 원정에서 김상현은 지독한 텃세에 고전을 거듭했다.

특히 윙소 수세노와의 동양 타이틀전에서는 한차례 다운을 탈취하는 등 일방적으로 우세한 경기를 하고도 18전 만에 첫 패배를 당해야만 했다.

이 패배의 경험을 약으로 삼아 김상현은 1978년 9월 칸토하를 판정으로 잡고 동양 jr웰터급 챔피언에 등극해 세계랭킹에 진입한다.

1978년 12월 30일 김상현은 WBC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사엔삭 무앙수린(태국)을 홈으로 불러들여 세계타이틀전을 벌인다.

무앙수린(태국)을 13회 KO로 꺾고 정상에 오른 김상현 챔프. 조영섭 제공

무앙수린은 태국 전통무술인 무에타이에서 59승 (55KO승) 9패의 전율적인 전적을 가진 태국 제일의 싸움꾼 출신이다.

1974년 11월, 24살의 다소 늦은 나이로 프로에 진출한 무앙수린은 데뷔전을 1회 KO승으로 장식하고 2차전에서는 라이온 후루야마를 7회 KO로 잡은 뒤 곧바로 1975년 7월 WBC 슈퍼 라이트급 챔피언 페르난데스(스페인)에 도전해 8회 KO승을 거두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대관식을 치뤘다.

무앙수린은 반칙패로 잠시 왕관을 벗었다 곧바로 되찾고 1978년 4월 모레노와의 7차방어전까지 성공리을 거둬 13승 (10KO) 1패를 자랑하는 관록의 챔피언이 된데다 그해 6월 인기 여배우와 결혼식까지 한 뒤라 가벼운 마음으로 김상현을 8차 방어 상대로 낙점, 원정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 28전 24승(14KO승) 2무 2패를 달리던 김상현은 강펀치를 보유한 같은 사우스포인 무앙수린을 철저히 연구 분석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지만 적을 모른 채 나를 알면 위태롭다'는 병법의 원리에 따라 김상현은 노회한 챔피언의 체력이 고갈된 중반 이후를 노렸다.

전략은 적중했고 좌우를 연타로 두들겨 맞아 대미지(damage)가 누적된 무앙수린은 13회에 통나무 쓰러지듯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침몰했다. 세계챔피언 밸트를 차는 순간이었다.

이후 1979년 6월, 카리브해에서 온 56전 40승 (28KO) 11패 5무의 검은 자객 귀세피와 1차 방어전을 치른다,

강펀치들이 즐비한 중남미에서 12년 동안 풍부한 경력을 쌓은 피츠로이 귀세피는 역시 호랑이굴에서 살아남은 호랑이다웠다.

김상현은 귀세피와 총 3차례 다운을 주고받는 치열한 타격전 끝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둔다.

경기중에 귀세피의 일격에 김상현이 다운 당하자 시청자 한 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비보를 접할 정도로 치열한 타격전이었다.

1979년 10월 치러진 원정 2차방어전에서는 1976년 이후 14연승(11KO승)을 기록중인 일본 중앙대 출신의 인텔리 복서 요까이 마사히로와 대결했다,

2차 원정방어전에서 요까이(일본)에 일격을 날리는 김상현 챔프(사진 오른쪽). 조영섭 제공

마사히로와의 경기에 동행했던 해설자 한보영 선생은 '당시 75Kg 이상이던 김상현이 뼈를 까는 고통 속에 슈퍼 라이트급 한계 체중인 63,5Kg에 맞춘 뒤 일본 원정길에 올랐는데 비행기내에서도 입에 물 한 모금 적시지 않은 채 수도승처럼 버티는 무서운 인내력과 요지부동의 집념을 읽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무렵 한국은 박찬희, 김성준에 이어 김상현까지 챔피언 트로이카 시대를 활짝 열었는데 3명의 복서가 공교롭게도 모두 부산 출신이었다.

1980년 2월 23일 김상현은 3차 방어전에서 소중한 벨트를 풀고 만다,

정상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이었다. 상대는 당시 33살의 자메이카 출신의 사올 맘비였다,

44전 27승 (11KO) 5무 12패를 기록한 그는 라이트급 통합 챔피언 듀란을 비롯해 세르반테스 무앙수린 등 세계적 강자들과 맞대결에서 단 한차례도 KO패 당하지 않은 톱랭커였다.

하지만 에이징 커브(aging curve)의 정점을 지나고 있는 33살의 노장임을 감안해 김상현은 홈링에서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예상과 달리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다 마의 14회 터진 맘비의 일격에 김상현은 좌초되고 말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상현은 맘비의 주먹에 KO된 것이 아니고 마지막 500g 체중감량에 아웃되고 말았다.

프로복싱만큼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슬픈 몰락이 극명하게 투영되는 종목도 없는 것 같다.

김상현은 맘비와의 경기 후 7개월 후인 1980년 9월 김광민과 맞대결에서 3대0 판정승을 거뒀는데 한계체중을 500g 넘은 64Kg으로 맞춘 결과였다.

'그 당시 몸이 날아갈 것처럼 컨디션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김상현의 표정에서 그가 10년간 현역 생활 중에 얼마나 극심한 감량 공포에 시달렸는지 읽을 수 있었다.

김상현은 1983년 4월 32전승(30KO승)을 자랑하는 WBA jr웰터급 챔피언 아론 프라이어와 미국 원정경기를 끝으로 49전 42승(25KO) 4패 3무를 남기고 링을 떠났다.

이후 1988년 6월부터 1992년까지 '88프로모션'에서 트레이너로 활약하며 1991년 6월, WBA F급 챔피언 콜롬비아의 알바레스의 타이틀에 도전한 김용강이 판정승으로 정상에 오를 때 수훈을 세웠다.

타이틀전을 앞두고 훈련중인 김상현 관장과 WBA 플라이급 챔프 김용강(사진 오른쪽). 조영섭 제공

앞서 김용강은 1989년 6월 태국원정에서 WBC F급 타이틀을 치탈라타에 내줬 1990년 9월 카오사이(태국)의 WBA jr B급 타이틀에 도전해 6회 KO패했다. 이처럼 슬럼프에 빠졌을 때 김상현이 다시 일으켜 세운 것.

'떡잎이 좋아도 햇살이 부족하면 좋은 나무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김용강은 빛을 못보다 그의 인생에 햇빛이 되어준 김상현을 만난 뒤로는 쑥쑥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상현의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세심한 지도에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하모니를 이룬 김용강은 1991년 10월 20승(14KO) 2패를 기록한 후에 페날로사 등과 펼친 1·2차방어전에서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정밀타격으로 방어에 성공했다.

당시 경기를 직접 봤던 필자는 김용강의 롱런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9월에 펼쳐진 3차 방어전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12승 (5KO승) 4패 1무를 기록한 구즈만과의 대결이었는데, 158cm의 단신에 별다른 강점이 없는 평범한 복서에게 허를 찔린 것이다.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경기를 앞두고 김상현 관장의 사소한 부탁을 매니저인 김철호가 냉정히 거절하자 자존심 상한 김상현 관장은 그대로 떠났고 멘탈이 붕괴된 김용강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었다.

돌아서는 김상현을 잡지 않은 김철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당시 체육관엔 명트레이너인 이영래 사범이 있었기에 김상현의 가는 발걸음을 김철호는 무덤덤한 시선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병법을 무시한 김철호의 선택은 부메랑이 돼 2년 후 프로모션을 붕괴시키기에 이른다.

트레이너 김상현이 떠난 후 김용강도 그 후유증으로 3차 방어전에서 완패해 은퇴 수순을 밟았고 이를 도화선으로 1993년 11월 문성길마저 10차 방어에 실패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6개월 뒤에는 '88프로모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아쉬운 결과로 이어졌다.

한세대를 풍미했던 챔피언들과 그들의 땀과 영광이 배있는 산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것이다.

김상현은 이후 1995년 부산으로 내려갔다.

김상현은 아세아체육관 복싱선배이자 학생선수권 라이트급 선수권자인 권철현 주일대사의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을 맡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챔피언 시절의 영광과 추억을 뒤로한 채 개인 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전 동양 챔피언 유종훈(사진 왼쪽)과 김상현 챔프( 가운데), 최진석 관장(오른쪽)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영섭 제공

그는 또 필자가 지도자를 시작한 지난 1989년 88 프로모션(회장 심영자)의 직장상사이기도 해 그의 현재 모습 하나하나가 많은 생각을 스치게 했다.

최근 김상현과 필자가 만난 자리에 동석한 전 동양 jr 웰터급 챔피언 유종훈 관장과 그의 현역시절 담당 트레이너였던 최진석 관장은 김상현 전 챔피언이 범아시아 복싱협회(PABA) 부회장을 겸직하는 것이 복싱에 대한 미련을 다 못 버린 것이라며 영광 재현을 그는 늘 꿈꾸고 산다고 귀띔 해줬다.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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