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스타 플레이어 출신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배드민턴 아카데미를 개설한 하태권 소장은 생활체육 동호인을 가르치며 개척하는 새 삶에 만족한 듯했다. 최규섭 기자 제1막은 22년간 펼쳐졌다. 화려한 선수 생활이었다. 그랜드슬램 금자탑까지 쌓으며 세계배드민턴연맹(BWF) 명예의 전당에 헌액(2013년)됐다. 2004 아테네 올림픽과 1999 코펜하겐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영혼의 단짝' 김동문과 한 호흡을 이뤄 오른 남자 복식 정상은 그 정점이었다.
제2막은 11년간 올라갔다.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당연히 엘리트 체육이었다. 국가대표팀과 명가(名家) 삼성전기와 요넥스에서 '승부사'로서 이름을 떨쳤다. 2008 베이징(北京) 올림픽 남자 복식 동메달(이재진-황지만)은 그 대표적 결실이다.
제3막이 오르며 1년이 흘렀다. 또 한 번 변신했다. 뜻밖에도 생활체육 지도자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색다른 모습이다.
요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명물이 나타났다. 하태권 배드민턴 아카데미다. 이 지역 생활체육 동호인 사이에서 회자하며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누가 개설했으며 또 가르칠까? 아카데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그랜드슬래머에 빛나는 하태권이다. 그가 소장으로서 또한 지도자로서 주역을 맡아 배드민턴 동호인의 양적 확대 및 질적 향상을 아울러 꾀하고 있다.
◇ 관행화한 길 뿌리치고 새 인생에 도전… 배드민턴 아카데미 개설하고 새 삶 개척하태권 배드민턴 아카데미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낸 뒤 기념 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직접 가르치는 하태권 소장이다. 하태권 제공 2019년도 다 저물어 가는 끝자락에, 한 가지 충격적 소식이 배드민턴계에 날아들었다. 하태권 요넥스 배드민턴 감독이 재계약을 포기하고 사임했다는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지도력에 한계를 느꼈다. 선수 시절 못지않은 열정과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과는 그만큼 투영돼 나오지 않는 듯해 답답했다.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었다."
선배들이 밟아 온 엘리트 코스를 답습하는 데에선, 존재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는 고백이었다. 관행화한 길에서, 주어진 역에 순응함으로써 고착화한 미래의 모습이 그려질 때면, 하루바삐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의 목소리가 갈수록 제어키 힘듦을 느꼈다고 한다.
"어느 순간 내 마음과 뜻과 다르게 삶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지는 시나브로 줄어들었다. '을'이 되기 전에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싶었다."
1985년, 그는 초등학교(전주 진북) 4학년 때 배드민턴 라켓을 처음 잡았다. 이후 36년간 배드민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옮겨 감'이었다.
"'방랑벽'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니며 경기를 치르는 게 배드민턴의 가장 큰 매력이며 계속할 수 있었던 동기 요소였다."
그가 요넥스 사령탑에서 스스로 물러난 뒤 처음 하려 했던 일이 여행인 점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여러 곳을 두루 보고 다니며 새로운 삶의 길을 구상하고 찾으려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돌연 불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는 그의 생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본의 아닌 칩거를 강요받은 이때,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간 키워드는 '가족'이었다. 그리고 이내 마음속으로 퍼져 갔다.
"아내(서지영 씨)와 딸(예린 양)과 보낸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팀에 얽매인 생활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계속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지내며 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했다."
활로를 찾았다. 배드민턴 동호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배드민턴 저변 확대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이었다.
2020년 9월, 드디어 하태권 배드민턴 아카데미가 문을 열었다. 물론, 가족과 같이할 수 있는 터전에 자리 잡았다. 가족의 둥지를 천안에서 아카데미가 자리한(모현읍 오산로) 근처로 옮겼다.
배드민턴을 제재로 한 그의 인생극은 이렇게 제3막이 올라갔다.
◇ 새로운 지평을 연 스승, 신기술 습득의 열정에 불타는 제자하태권 소장(가운데)이 기술을 어떻게 구사할지를 꼼꼼하게 지도하고 있다. 최규섭 기자 하태권 소장이 선수와 지도자로 밟아 온 발자취는 눈부시다. 강산이 세 번도 넘게 변하는 동안, 쭉 꽃길을 걸어왔다. 그런 그에게, 동호인 지도는 고충이 뒤따를 성싶다.
"그런 일면도 있긴 하다. 라켓을 처음 잡는 분도 있다. 지도를 소화하지 못할 때면 간혹 답답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 심정은 엘리트 선수를 지도할 때도 일곤 했다."
그는 오히려 즐거운 듯했다. 생활체육 세계에 들어선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전혀 지쳤거나 탐탁지 않은 기색을 엿볼 수 없었다. 무엇이 그의 성취 의욕을 북돋우는지 궁금했다.
"동호인들의 열정이다. 1주일 내내 7회 운동하는 분들도 있을 만큼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열성이 대단하다. 연구하며 배드민턴을 치는 분들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나타난 문제점을 (나와) 함께 토의할 정도다."
그도 동호인의 이런 진지한 태도에 부응키 위해 노력한다. 그날그날 일일이 훈련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해 피드백(Feedback) 자료로 활용한다. 다음 훈련 때 집중적으로 보완할 부분을 미리 파악해 두기 위함이다.
"선수로 활약할 때도 지도자로 가르치던 시절에도 매일 훈련 일지 작성을 잊지 않았다. 그 습관이 지금 동호인을 가르칠 때 큰 도움을 주리라곤 그때엔 생각하지 못했다(웃음)."
이토록 온 힘을 다하는 그이지만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도자로서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하는 숙명이다.
"무슨 내용을 어떻게 잘 가르쳐야 할지 고심한다. 막막할 때도 있다. 실력이 향상될 수 있도록 하고, 흥미를 높여 주며, 땀까지 흘리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강습 시간을 편성하려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의 열과 성을 다한 지도는 동호인을 감명시키며 그들의 마음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다른 데서 2년 동안 배운 것보다 이곳 아카데미에서 1주일 받은 교습이 더 낫다."라고 호평하는 동호인이 수두룩하다.
또한, 그와 아카데미의 명성은 입소문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용인시를 넘어 멀리 다른 지역에서도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직접 가르친다."라는 점도 확산의 한 배경이다.
"사실, 올림픽 무대에서 우승한 선수 출신이 동호인을 대상으로 '직접' 지도하는 곳은 우리 아카데미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올림픽, 세계 선수권 대회, 아시안 게임, 아시아 선수권 등 주요 국제 무대에서 경험하고 느꼈던 바를 가르치고 이를 배울 수 있다는 건 분명 강점이자 차별화 요소다."
150평(496㎡) 규모의 하태권 배드민턴 아카데미는 세 개의 코트를 갖췄다.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문을 여는 이곳을 활동 무대로 삼은 클럽만 해도 여섯 개에 이른다. 현재 그의 지도를 받는 수강생은 약 30명이다. 일반 이용객도 상당하다.
하태권 소장(뒷줄 오른쪽)이 아카데미 회원들과 함께 강습 내용을 짚어 보고 있다. 하태권 제공 배드민턴 활성화를 좇는 그의 화살은 어느 과녁을 향하고 있을까?
"동호인의 기량 향상이다. 동호인이 지금까지 느끼거나 겪지 못했던 기술을 새로 접하고 습득케 하려고 한다. 어렵긴 하나 추구하고 도달해야 할 방향이라 생각한다."
이 맥락의 연장 선상에서, 그는 언젠가 엘리트계로 되돌아갈 뜻을 전혀 버리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결국, 한국 배드민턴계가 양적·질적으로 균형을 이뤄 성장하는 데 작은 밀알이 되려는 마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배드민턴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는 선수들이 존재하는 팀이라면 다시 지휘봉을 잡고 싶은 생각도 있다. 그렇긴 해도 지금은 가족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는 영락없는 '배드민턴인'이다. 배드민턴을 사랑하는 마음에, 절로 감명을 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다.
"배드민턴은 나의 삶이자 모든 것이다.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열심히 배드민턴을 연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