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NOW]'탁구신동' 유남규, 금 10·은 9·동 11로 황제 등극(하)

고교 1년생 때 당한 북한전 참패 때문에 기로에 내몰려
어두웠던 '방황의 터널'에 찾아든 '희망의 빛' 스웨덴 유학
지도자의 길에서도 열매맺이… 6년간 남자 국가대표 전임 지도자로 활약
또 하나의 야심작 딸, '탁구 신동' 대물림

대한민국 올림픽 영웅들의 그 시절, 그리고 오늘(5)
올림픽 탁구 첫 단식 금메달리스트, 첫 그랜드슬래머 유남규(하)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탁구 남자 단체전에서, 유남규 감독(가운데)이 지휘한 한국은 은메달을 획득했다. 앞줄 왼쪽부터 유승민 코치, 주세혁, 이정우, 정상은, 김동현, 김민석. 유남규 제공

1984년 10월, 우리 나이 열일곱 살의 청소년 유남규에게 시련이 닥쳤다. 신이 그가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위해 깔아 놓은 시험대였다.

무대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린 아시아 탁구 선수권 대회였다. 그 전해 중학생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선풍을 일으켰던 그가 출전한 첫 메이저 국제 대회였다.

남자 단체전 준결승전에서, 한국은 북한과 만났다. 북한 탁구가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던 시절이었다.

출전 엔트리를 짤 때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자칫 남·북한전에서 졌을 경우 후유증이 커, 누구도 선뜻 출전을 희망하지 않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베테랑 김완·김기택도 마찬가지였다.

정적을 깨고 고교 1년생 막내가 당돌하게 나섰다. 유남규였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자원 출장이었다.

경기는 양팀에서 세 명씩이 나와 돌아가며 붙는 9단식 5선승제의 스웨이들링컵 방식으로 치러졌다. 그가 첫 번째로 나갔다. 상대는 홍철이었다.

그가 받아든 성적표는 참담했다. 세 번 나가 모두 물러섰다.

결국, 한국은 3:5로 분패했다. 결승에 오른 북한은 중국에 져 준우승했다.

"숙소로 돌아와 엄청 울었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물 안 개구리였다. 성인 무대의 벽이 무척 높다는 걸 깨달았으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1983년 12월 바레인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최연소 대표로 발탁된 유남규가 활약한 한국은 원년 패권을 차지했다. 사진 오른쪽 두 번째부터 유남규, 이정학, 박지현. 유남규 제공

사실 그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바탕이 있었다. 1983 아시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만리장성 중국을 허물고 단체와 복식(배종환)에서 2관왕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탁구를 계속할지 그만둘지 갈림길에서 방황했다. 다시 탁구 라켓을 잡을 의욕이 좀처럼 일지 않았다."

이미 4년 전, 6개월 정도 선수 생활을 접었던 경험이 있던 그였다. 초등학교(부산 영선) 6년 때 부모(유흥길-한금연 씨)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운동을 그만두고 공부에 몰두했던 바 있었다. 소년 체육대회를 비롯해 전국 대회를 휩쓸던 소년으로선 내리기 힘든 결단이었다.

일반 학생으로 중학교에 진학했던 그는 한 지도자의 뚝심으로 되돌아왔다. 이젠 고인이 된 이인수 부산 남중학교 탁구 코치가 부모를 찾아와 끈기 있게 설득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택권을 줬다. "공부와 탁구 중 잘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골라 매달려라" 라는 말과 함께. 그의 대답은 물론 "탁구" 였다.

탁구 선수로 돌아온 그해, 1981 전국 소년 체육대회 중학부 단체전 우승은 1년생인 그가 활약한 부산 남중의 몫이었다.

◇ 스웨덴 유학으로 '방황의 늪' 건너… 세계 강호들과 맞부딪치며 실력 일취월장

유남규 감독의 열정이 깃든 파이팅은 선수 시절의 승부 근성을 연상케 한다. 유남규 제공

1984 아시아 선수권 대회가 끝나고, 유남규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어둠 속에서 헤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한탁구협회(회장 최원석·당시)는 그에게서 '희망의 빛'을 봤다.

협회는 한국 탁구의 밝은 미래를 열 재목으로 그를 점찍고 해외 유학을 보냈다. 중국과 함께 세계 남자 탁구계를 양분하는 스웨덴에서 기량을 갈고닦으라는 장기적 포석이었다.

두 번(1984·1985년)에 걸쳐 1년 동안 명가(名家) 앵비클럽에서 받은 담금질은 그의 탁구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올림픽 1회(1992 바르셀로나 단식)와 세계 선수권 대회 6회(단체 4·단식 2) 우승에 빛나는 월드 스타 얀-오베 발드네르를 비롯해 미카엘 아펠그렌, 에리크 린드 등 세계 강호들과 경기하면서, 자신감과 실력이 시나브로 쌓여 가고 늘어났다.

"유럽 탁구를 배우며 성숙해졌다. 나보다 나은 여러 전형의 선수들과 자주 맞부딪치면서 쌓은 경기 경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양분이 됐다. 아울러 어려운 상대를 어떻게 공략할지 경기 운영력을 체득할 수 있었다."

실마리를 찾아 풀어 가는 플레이에 능해 'IQ 200', '꾀돌이' 등으로 불렸던 그의 천재성이 번뜩이는 경기 운영 능력은 어쩌면 이때 배양되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3학년 때인 1983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유남규(가운데)는 단체·단식·복식을 석권하며 3관왕에 올랐다. 유남규 제공

그러나 드러낼 수 없었던 고충도 있었다.

"단돈 100달러만 지닌 채 갔다. 식비론 어림도 없었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버티던 시절이었다."

스웨덴 유학 처방전은 주효했다. 1985 나고야 아시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그가 선봉장으로 맹활약한 한국은 정상에 오르며 2연패를 이뤘다. 결승전에서, 북한을 5:3으로 꺾었다. 1년 전 자신을 방황의 나락에 떨어뜨렸던 북한을 상대로 한 통쾌한 설욕전이었다.

◇ "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 주요 국제 무대에서 금 10, 은 9, 동 11개 결실

감독으로서 선수를 가르칠 때 모습에선, 진지함이 넘쳐 난다. 최규섭 기자

1999년 6월, 유남규는 은퇴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짝사랑하는 급우의 관심을 끌려고 탁구 라켓을 잡은 지 21년 만에, 국내외 무대를 휩쓸던 날개를 접었다.

우리 나이 스물두 살에 일찌감치 그랜드슬램 금자탑을 쌓았던 그였다. 이후로도 세계 정상권을 넘나들며 일세를 풍미했다.

단·복식에 모두 뛰어났던 그는 복식에서도 풍성한 수확을 올렸다. 올림픽 무대에서만도 남자 복식 동메달을 세 개씩이나 결실했다. 1988 서울 대회에선 안재형과, 1992 바르셀로나 대회에선 김택수와, 1996 애틀랜타 대회에선 이철승과 각각 짝을 이뤄 3회 연속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랜드슬램 위업의 마침표도 현정화와 호흡을 맞춘 혼합 복식(1989 도르트문트)에서 찍었다. 1993 예테보리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현정화와 손발을 맞춰 혼합 복식 은메달을 따냈다.

그는 어렸을 때 키웠던 꿈대로 태극 마크를 달고 각종 국제 무대에서 국위를 선양했다. ▲ 올림픽에서 금 1, 동 3개를 ▲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금 1, 은 1, 동 4개를 ▲ 아시안 게임에서 금 3, 은 5, 동 3개를 ▲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금 2, 은 3, 동 1개를 ▲ 월드컵에서 금 3개를 각기 거둬들였다.

물론 쓰라린 기억도 있다. 1991 지바(千葉)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당한 수모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남북 단일팀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그는 단체전을 비롯해 4종목에 출전하며 투지를 불살랐다.

그러나 비참했다. 단체·단식·복식(김성희)에선 8강전에서, 혼합 복식(현정화)에선 16강전에서 모두 분루를 삼켰다."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잊으려고 못 먹던 술을 마시기까지 했다. 47일간 전지훈련을 하며 우승을 꿈꿨는데…. 허리 디스크가 발병해 2년여 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 지도자로서도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 대회 등에서 결실… 딸은 쑥쑥 자라는 '탁구 꿈나무'

유남규 감독(오른쪽)의 조련을 받은 삼성생명은 2018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왼쪽부터 주세혁 코치, 김유진, 박세리, 최효주, 정유미, 조유진. 유남규 제공

21세기를 연 2000년, 유남규는 탁구 인생 제2막을 열었다. 제주 (농심) 삼다수 창단팀 코치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조련사로서도 역량을 뽐냈다. 지기 싫은 강한 승부 근성은 지도 철학에도 그대로 투영돼 성과를 올렸다. 그야말로 '승부사'였다.

그는 2년 만에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 반열에 올랐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남자 대표팀 코치로서 금 1(복식·이철승-유승민), 은 3[단체·복식(김택수-오상은)·혼합 복식(유승민·유지혜], 동 1개(단식·오상은)을 획득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2004 아테네 올림픽을 불과 몇 달 앞두고 국가대표팀 코치스태프에서 물러나는 아픔도 겪었다. 그렇지만 2008년 다시 사령탑의 일원으로 되돌아왔다. 이번엔 국가대표 전임 지도자였다.

그는 2014년까지 남자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각각 두 번의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서 꾸준히 열매를 맺었다. 올림픽에선, ▲ 2008 베이징(北京) 대회 때 코치로서 동메달(단체)의 ▲ 2012 런던 대회 때 감독으로서 은메달(단체)의 성과를 냈다. 아시안 게임에선, ▲ 2010 광저우(廣州) 대회 때 은 1(단체), 동 2개[단식(주세혁)·복식(정영식-김민석)]를 ▲ 2014 인천 대회 때 은 1(단체), 동 2개[단식(주세혁)·혼합 복식(김민석-전지희)]를 결실했다.

그는 2015년 야인으로 지냈다. 재충전을 위해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고사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1년 뒤 삼성생명 여자팀 감독으로 다시 지휘봉을 잡았다. 처음 앉는 여자팀 사령탑이다.

그의 지도력은 여전히 녹슬지 않고 빛을 발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현역 국가대표로서 활약하고 있다. 지난 8월 무주에서 열린 2021 휴스턴 세계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2020 도쿄(東京) 올림픽에 나갔던 최효주와 이시온이 관문을 통과하며 태극 마크를 달았다.

아버지로서 딸(예린·오른쪽)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탁구 신동’의 대물림은 가시화되고 있다. 유남규 제공

그는 또 다른 열망을 불태운다. 자신의 별호였던 '탁구 신동'의 대물림이다.

아버지의 뛰어난 자질을 물려받은 듯 딸(예린·서울 문성중 1년)은 빠르게 성장하는 꿈나무다. 초등학교(군포→ 수원 청명) 1학년 때 탁구 라켓을 잡은 딸은 일찌감치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초등연맹이 주최하는 각종 대회를 휩쓸며 2~6년 5년간 학년별 단식 랭킹 1위를 독차지했다.

"일요일마다 한 시간씩 가르친다. 자질은 상당한 듯하다. 열심히 배우려 하며 습득하는 속도도 빠르다. 기대하고 있다."

올해부터 대한탁구협회와 실업연맹 부회장을 맡은 그이지만, 역시 여느 아버지와 똑같다. 부성애를 감추지 못한다. 딸을 생각하면 마냥 즐거운 양 미소를 짓는다.

신동에서 황제로, 다시 승부사로 변신한 그의 앞날은 어떻게 펼쳐질까? 앞길에 생각지 못한 걸림돌이 없을 리 없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오뚝이 같은 승부 기질로 뭉친 그가 결코 쓰러지지 않고 가야 할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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