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NOW] '왼손 포핸드 드라이브' 유남규, 유일무이한 그랜드슬램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2관왕에 오르며 '신동' 별호 얻어
세계 챔프 장자량까지 희생양 삼으며 단식 금메달 수확
1988 서울 올림픽에서 금 쟁취… 11연승 내달리며 초대 챔프 등극
1989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 남자 탁구 최초 그랜드슬램 위업 이뤄

대한민국 올림픽 영웅들의 그 시절, 그리고 오늘(5)
올림픽 탁구 첫 단식 금메달리스트, 첫 그랜드슬래머 유남규(상)


1988 서울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김기택을 제치고 우승하는 순간 유남규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포효하고 있다. 사진 출처 일간스포츠 발간 ‘1989 스포츠 사진 연감’

1980년 1월 어느 날 새벽, 겨울의 찬 공기가 휘감은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부산 영도다리에서 이송도 약수터로 가는 오르막길은 아직 어둠마저 가시지 않아 더욱 찬 기운이 감돌았다.

한 소년이 어둠을 헤치고 뛰어가고 있었다. 초등학생인 듯한 나어린 소년은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달음질에만 열중했다. 그 당찬 기세에, 차가운 바닷바람이 오히려 움츠러들며 물러서는 듯싶었다.

소년은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며 스스로를 닦달하고 있었다. '반드시 국가대표가 돼 온 세계에 태극기를 휘날리겠다.'

9개월 전 가슴속 깊숙이 파고들었던 인상적 장면이 다시금 떠오르며 눈앞을 스쳐 갔다.

1979년 3월, WBC(세계복싱평의회) 플라이급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도전자 박찬희가 미겔 칸토(멕시코)를 물리치고 새로운 챔프로 등극하던 그때 다지고 꿈꿨던 각오요 열망이었다.

3년이 흘렀다. 한국 탁구계가 흥분에 휩싸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중학교(부산 남) 3년생이 일으킨 물결은 참으로 대단했다.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 발탁 기록으로 이어진 선풍이었다.

국가대표의 꿈은 이뤘다. 소년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태극기를 거세게 펄펄 나부낄 그 날을 향해 달려가리라.'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유남규는 2관왕(단체·단식)에 오르며 대회 MVP(최우수선수)에 올랐다. 유남규 제공

1986년 9월 28일 서울대학교 체육관,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탁구 개인 단식 8강전이 벌어졌다. 고교(부산 광성공·현 경성전자) 3년생이 된 소년과 장자량(江嘉良·중국)이 맞붙은 한판이었다.

장자량이 누군가? 1년 전,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단식 정상에 오른 챔프였다. 적수가 없음을 뽐내며 무적 시대를 구가하던 세계 랭킹 1위의 독보적 존재였다.

소년은 전혀 두려워하지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팽팽한 격돌이었다. 4세트까지 2:2, 승부의 저울추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5세트에서, 소년이 관록의 장자량에게 밀리는 듯했다. 10:18까지 몰렸다.

이때부터였다. 믿기 힘든 반전이 일어났다. 소년의 거센 패기가 장자량을 압도하며, 양상이 돌변했다. 22:20! 대역전극이었다. 게임(세트) 스코어 3:2, 소년이 마지막에 웃었다.

신은 마지막 순간 소년에게 미소를 보냈다. 소년은 환호로 화답했다.

"40여 년의 탁구 인생 중 가장 못 잊는 한판이다. 그때 느꼈던 그 극도의 짜릿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35년이 흘렀지만, 그 순간의 흥분과 감동은 여전히 그대로인 양, 목소리는 열기를 띠었다.

이적 같은 대파란을 일으킨 소년의 기세는 금메달도 집어삼켰다. 이틀 뒤 결승전에서, 소년은 후이쥔(惠鈞·중국)을 3:0으로 완파하고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소년은 대회 MVP에 선정됐다. 엿새 전 열린 단체전에서도, 김완·안재형과 호흡을 이뤄 만리장성 중국을 5:4로 꺾고 금메달을 수확했던 소년은 2관왕에 오르며 최우수선수에 뽑혀 더욱 진한 감격을 누렸다.

마침내 소년은 6년 만에 자신의 열망을 이뤘다. 아울러 '탁구 신동'이란 별호까지 얻었다.

끝이 아니었다. 비로소 '위대한 여정'의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탁구 황제'로 등극하는 첫 막을 활짝 연 유남규였다.

올림픽 탁구 첫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한국 남자 탁구 사상 유일무이한 그랜드슬래머. 그가 쌓은 금자탑은 화려하기만 하다.

◇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첫 왕좌에 앉다… 11연승 내달리며 금메달 거머쥐어

유남규 삼성생명 감독은 인터뷰 내내 환한 표정으로 달변을 이어 갔다. 최규섭 기자

탁구와 1988 서울 올림픽은 깊은 인연으로 맞닿아 있다. 서울 대회에 이르러서야 탁구는 꿈의 무대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첫선을 보였다. 그만큼 탁구 선수에겐 대망의 무대로 다가온 서울 올림픽이었다.

소년에서 약관(弱冠·20세)으로 성장한 유남규에게도 그랬다. 여의주를 움켜쥐고 승천하려는 용의 심정이랄까? 지기 싫어하는 무서운 승부 근성으로 불타는 그의 야망은 물론 올림픽 초대 단식 챔피언이었다.

용솟음치는 기세는 대를 쪼개듯 거침없었다. 그의 강력한 왼손 포핸드 드라이브에, 상대는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주저앉았다. 예선리그 7승을 비롯해 준결승전까지 10연승을 내달렸다. 이때까지 30게임(세트)을 따내며 단 2게임만을 내주는 압도적 완승의 질주였다.

금메달로 가는 길엔, 뜻밖의 구도가 펼쳐졌다. 한 해 앞서 열린 1987 뉴델리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다퉜던 장자량과 얀-오베 발드네르(스웨덴)의 모습은 결승전에서 볼 수 없었다. 장자량은 16강전에서, 발드네르는 8강전에서 각각 좌초했다.

1988 서울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시상식에서, 우승한 유남규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꽃다발을 치켜들어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유남규 제공

각축전 끝에 마지막 한판을 벌이는 두 주인공 역을 모두 '태극 도령'이 차지했다. 그와 6년 선배 김기택이 금메달을 놓고 자웅을 겨뤘다.

결승전은 10월 1일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금메달을 쟁취한 최후의 승자는 그였다. 첫 게임을 내준 뒤 내리 세 게임을 딴 그가 역전극에 마지막 한 점을 찍었다.

"첫 게임을 17:21로 져 빼앗긴 뒤 '질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오기가 치밀었다. 상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게임부터 '파이팅!'을 잇달아 외치며 온 힘을 다 쏟았다."

그의 말처럼, 올림픽 탁구 단식 첫 우승의 영예를 안으려는 열망으로 말미암은 금메달 각축전은 그만큼 더욱 열기가 드높았다.

◇한국 남자 탁구 사상 전인미답의 그랜드슬램 금자탑 쌓다

1989 도르트문트 세계 선수권 대회 혼합복식에서, 유남규(왼쪽)는 현정화와 짝을 이뤄 정상에 오르며 한국 남자 탁구 최초의 그랜드슬램 금자탑을 쌓았다. 사진 출처 일간스포츠 발간 ‘1990 스포츠 사진 연감’

1989년을 밝히는 원단의 해가 떠올랐다. 유남규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올림픽 우승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또다시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섰다. '그랜드슬램을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라는 열망을 불태우며 새해를 맞았다.

그는 1986 아시안 게임(단식·단체)에서 그랜드슬램 등정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1888 니가타(新潟) 아시아 선수권 대회(혼합복식·현정화)에서 두 번째, 1988 올림픽(단식)에서 세 번째 발걸음을 잇달아 옮겼다.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남았다. 밟고 넘어서야 할 마지막 산은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이었다. 1988년까지 그에게 난공불락으로 버티던 전장이었다. 이제까지 최고 전과는 1987 뉴델리 대회 때 안재형과 짝을 이뤄 따낸 복식 동메달이었다.

1989 세계 선수권 대회는 3월 29일~4월 9일(이하 현지 시각)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렸다. 어린 나이에 올림픽을 제패한 그가 황제로 자리매김하며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지를 가름할 운명의 마당이었다.

양상은 기대를 비껴가며 흘러갔다. '좌절의 늪'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식과 복식(김택수)에서 모두 16강 탈락의 고배를 들었다. 단체전에서도 소련(이하 당시)에 3:5로 패퇴하며 분루를 삼켰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카드는 현정화와 짝을 이룬 혼합복식이었다. 더는 물러설 데가 없는 그는 배수진을 친 심정으로 온 힘을 기울였다.

시련은 끝났나 보다. 신은 더는 그를 희롱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녹아웃 시스템으로 벌어진 16강전부터 결승전까지 단 한 게임만 빼앗기며 2:0 가도를 내달렸다.

4강전이 고비였으나, 걸림돌은 아니었다. 중국의 천룽찬(陳龍燦)-천징(陳靜) 조를 2:1로 제쳤다.

최후의 대회전인 결승전은 오히려 훨씬 쉬웠다. 유고의 조란 칼리니치-고르다나 페르쿠친은 적수가 아니었다. 2:0(21:7, 21:13) 완승으로, 42점을 따내는 동안 내준 점수는 단 20점이었다.

드디어 금자탑이 완성됐다. 한국 남자 탁구 역사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그랜드슬램의 새 지평을 열었다.

‘탁구 황제’ 유남규의 빛나는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메달을 비롯한 각종 기념품이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서울 올림픽 단식 금 기념 핸드 프링팅, 그때 금메달, 주요 대회에서 수확한 메달들, 서울 아시안 게임(왼쪽)과 서울 올림픽 우승 당시 사용했던 라켓이다. 유남규 제공

그 뒤 32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뒤를 잇지 못했다. 찬란한 금빛 탑은 신기루인 양 사라지고 더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고 있다.

첫 획부터 마지막 한 점까지 3년이 걸렸다. "절망은 없다. 오직 시련이 있을 뿐이다."라며 쓰러지지 않고 달려온 데서 비롯된 위업이다.

그런 그도 한때는 탁구를 그만둘까 했었다. 그 이전엔, 그만둔 적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하]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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