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HISTORY]복싱계 관포지교 김인창·이재훈의 '인생유전'

1974년 전국신인복싱에서 만난 이재훈과 김인창의 복싱 우정 스토리
재능만큼 꿈 펼치지 못한 이재훈·시작은 미비했으나 세계적 반열 오른 김인창

무더위가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지난 주말, 복싱계의 대표적인 관포지교(管鮑之交)이자 50년 지기인 김인창(한국체대)과 1979년 세계군인선수권대회 은메달 리스트인 이재훈(수경사) 등 두 복서가 필자의 체육관을 찾아와 복싱 역사 50여년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복싱계 50년 지기인 이재훈과 김인창(사진 오른쪽). 조영섭 제공

대화가 깊어질수록 링 위에서 재능만큼 꿈을 다 펼치지 못한 이재훈과 시작은 미비 했지만 후에 세계적 복서 반열에 오른 김인창의 이야기가 수 많은 주먹계의 역전승부들과 오버랩되며 만감이 교차했다.

현재 남양주시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김인창은 1957년 10월 강원도 화천태생으로, 1973년 상경해 경흥 체육관의 윤창수(경희대) 관장 지도 아래 복싱에 입문했다.

수련 5년만인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의 김동훈을 잡고 LW급 금메달을 따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의 김동훈을 잡고 우승한 김인창. 조영섭 제공

그는 이어 1979년 9월, 75개국이 출전한 케냐 골든컵 대회에 나서 1회전에서 미국의 조맨리에 RSC승, 8강에서 서독 대표에 2회 KO승, 4강에서 필리핀의 아도요에 판정승으로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 아프리카 최우수복서인 페트릭 와웨루(케냐)에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팀에 유일한 금메달을 안겼다.

같은 해 11월 LA 시장배 복싱 결승에서는 캐나다 선수를 꺾고 국제대회 3관왕을 차지하며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IBA) 랭킹 7위에도 올랐다.

이처럼 혁혁한 전적으로 1980년 대한체육회 최우수 선수와 문교부에서 주는 대한민국 경기부문 체육상을 수상하는 등 나름 화려한 이력을 지닌 복서다.

막강 화력의 김인창은 1974년 전국 신인대회에 출전해 평생지기가 된 영등포체육관 소속의 독일 탱크라 불리는 이재훈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컴퓨터 복서였던 김인창은 1회전에서 만난 이재훈의 변칙적인 경기운영에 판정으로 무너지고 만다.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헤드 워크와 보디 워크를 바탕으로 상대를 누에처럼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상대 체력이 모두 소진됐다 싶으면 한순간에 고래처럼 삼킨다는 잠식경탄(蠶食鯨呑)의 이재훈식 공격에 맥을 못춘 것이다.

1956년 11월 인천태생의 이재훈은 복싱을 수학하기 위해 인천에서 서울의 여러 체육관을 수소문하다 결국 홍순만 관장이 운영하는 영등포 체육관을 낙점했다.

이 체육관은 김현치를 위시해 104연승 신화를 창출한 박일천, 황순철, 전학수, 이필구, 장윤호. 박대천, 이만덕 등 당시 400 여명의 관원이 훈련했던 장소다.

이재훈은 1972년 뮌헨 올림픽 1차 선발전 결승에서 이거성(경희대)을 꺽고 우승했던 이장수(동아대)를 판정으로 잡은 경기를 필두로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밴텀급 국가대표인 김창석(육군), 1975년 아시아 청소년선수권(필리핀) 최우수복서 김운석(원광대), 1979년 킹스컵 국가대표인 곽동성(원광대), 전국체전·대통령배 8회 우승한 관록의 천흥배(조선대), 1978년 세계선수권(유고) 국가대표 임병진(중앙대) 등 난적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한국 아마추어복싱의 대들보로 자리 잡아갔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복싱 3차 선발전에서 우승한 전학수와 이재훈(사진 오른쪽). 조영섭 제공

특히 1975년 제5회 대통령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3차 선발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4차 선발전 우승과 함께 제59회 전국체전에서도 연거푸 밴텀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국가대표로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당시 대한 체육회장이었던 김택수 회장이 가장 반갑게 포옹해주면서 넘치는 그의 파이팅을 칭찬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김택수 회장은 1972년 뮌헨 올림픽 선발전에서 캥거루 복싱을 펼치는 페더급의 김성은(해군)을 전격 탈락시키고 LM 급의 하드 펀처 임재근(천일체)을 대타로 발탁해 참가시킬 정도로 이재훈처럼 공격력이 우수한 복서를 선호한 체육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관록과 노련미를 겸비해 가던 이재훈에게도 천적이 나타난다.

다름 아닌 박인규(금강유리)와 함께 밴텀급을 양분한 황철순(한국화약)이었다. 고비 고비마다 황철순과 4차례 맞대결한 이재훈은 매게임 박빙의 승부를 펼쳤지만 근소한 차이로 고개를 숙인다.

1977년 4월 수경사에 입대한 이재훈은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질수는 없다는
수사불패(雖死不敗)의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맞대결에서도 3연패를 당한다.

이재훈의 세찬 공격을 미꾸라지처럼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황철순의 아웃복싱에 녹아들면서 7연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의기소침해진 이재훈에게 절친 김인창은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말고 승리에 겸손한 올곧은 복싱인으로 살아가라며 격려해준다.

친구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힘을 얻어서일까?

전역을 앞둔 이재훈은 1979년 7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벌어진 '제31회 세계군인선수권대회'에 참가해 첫판에 남미선수권 최우수복서인 홈링의 베네수엘라 선수를 일방적으로 몰아부쳐 3회 RSC로 제압한 후 준결승에서 서독의 보리스네에 2회 KO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다.

국내에서 황철순에게 밀렸던 한이라도 풀 듯 이재훈은 결승에서도 미국의 로렌스 하위에게 전 라운드에 걸쳐 원사이드한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어이없게도 뒤집어진다.

이에 단장으로 참석한 이진백 인사 참모는 이재훈을 링 위에서 내려오지 말라며
무려 1시간 10분에 걸쳐 거센 항의를 했지만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순 없었다.

1964년 동경 올림픽 '플라이급' 8강전에서 한국의 조동기가 소련의 소로킨에게 1분 6초만에 실격패를 당해 항의한 51분, 1988년 서울 올림픽 '밴텀급'에서 변정일 선수가 항의한 67분을 뛰어넘는 역대급 항의 기록을 세울 정도로 편파적인 판정이었다.

당시 이대회 F급에서 우승한 후에 IBF Jr 페더급 챔피언을 지낸 김지원은 필자와의 대담에서 "이재훈 선배의 완승이었지만 외교력을 발휘한 미국의 영향력에 뒤집어진 경기" 라며 "출중한 실력에 비해 지독하게 운이 따르지 않은 불운의 아이콘 이 바로 이재훈 선배였다"고 회고했다.

이재훈은 1980년 1월 전역 후 아마 선수 생활 때 경험을 토대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인 장흥민과 절친 김인창의 트레이너로 활약하다 이마저 접고 연고지 인천 계양구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밤의 황제로 변신했다.

1983년 프로 데뷔전을 치룬 장흥민의 트레이너로 활약한 이재훈(사진 오른쪽). 조영섭 제공

당시 월 수익 억대를 넘었던 이재훈은 스포츠 용품을 납품하던 김인창에게 '사업에 필요하면 얼마든지 돈을 가져다 쓰라'고 했지만 김인창은 끝내 그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이재훈의 천부적인 재능을 아까워했던 김인창은 복싱으로 맺은 인연이 금전문제로
금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을 정도로 심지가 굳었다.

이후 복싱계의 레이더망에서 사라진 비운의 복서 이재훈의 소식을 수소문하다 한 순간에 전 재산 50억원을 연기처럼 날린 후 재기를 다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재훈은 여러 풍파를 딛고 살아 인생답게 오뚜기처럼 일어나 인천광역시 서구에 위치한 글로벌 UPS 배터리 재생업체이자 KT 협력 업체인 (주)멕시비에스 코리아란 회사의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주>멕시비에스 이병년대표와 함께한 이재훈 본부장(사진 왼쪽). 조영섭 제공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해도 희망만 남아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희망은 항상 영원한 출발이자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를 실증(實證)해 보이 듯 환갑을 훌쩍 넘긴 이재훈은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정열과 투지까지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니기에 초심을 잃지 않고 전력투구한다”며 "사업에서마저도 비운의 이재훈이라는 소리를 결코 듣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였다. 앞길에 건승을 빈다.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