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올림픽 영웅들의 그 시절, 그리고 오늘(4)
두 차례 그랜드슬램에 빛나는 올림픽 3관왕 박성현(하)
박성현은 2008 베이징(北京)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정상에 오르며 두 번째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여자 단체전 시상식에서, 박성현-윤옥희-주현정(가운데 왼쪽부터)이 손을 흔들며 금메달의 감격을 누리고 있다. 대한양궁협회여고 시절도 다름없었다. 여중 때와 마찬가지로, 성과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자도 밟기 어려운 시간만 야속하게 흘러갔다.
김창훈 전북체고 감독은 묵묵히 기다렸다. 온 힘을 다해 활과 씨름하는 제자가 언젠가는 신의 마음을 흔드는 그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박성현이 잊지 못하는 스승으로 손꼽는 까닭이다.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신, 두 스승 가운데 한 분이시다. 두 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스승'이시다."
진로마저 불투명했다. 전국 무대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는 소녀를 눈여겨보는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암울한 그늘이 드리워지던 시기에, 햇빛이 다가왔다. 또 하나의 영원한 스승인 서오석 전라북도청 감독이 내민 손길은 따뜻했다.
전북체고를 졸업하는 네 명 궁사 가운데, 그만이 홀로 낙점받았다. '금메달 제조기'다운 놀라운 안목을 지닌 서 감독은 망설임 없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나아갈 방향이 결정되며 힘을 얻었음일까? 그는 고교 마지막 무대인 2000 부산 전국 체육대회 양궁 70m에서 동메달을 땄다. 첫 메달로, 마중물이었다.
◇ 계속된 담금질, 시나브로 성장
서오석 코오롱 감독(왼쪽)과 박성현 전라북도청 감독은 영원한 사제지간의 정을 쌓아 간다. 박성현 제공 박성현은 첫걸음부터 다시 내디뎠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기본기부터 체득했다. 견디기 힘든 겨울철 담금질이 계속되며, 그는 시나브로 성장해 갔다.
"감독님은 체격 조건을 보고 뽑으셨다고 한다. 당시로선 큰 키(1m 72)에 힘을 갖춰 기본적으로 양궁에 유리한 조건이었다고 판단하셨던 듯싶다."
서오석 감독의 구상에 따라 먼저 체력 운동에 집중했다. 그리고 기본기를 배양했다. 활을 당기는 자세부터 가다듬었다. 장거리는 일단 제쳐 두고 단거리 쏘기 훈련에만 전념했다.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1년만 버티고 그만두자.'는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들곤 했다.
양궁에 매진하겠다고 결의를 다지게끔 한 동기부여는 생각지 못했던 엉뚱한 데서 찾아왔다.
"첫 월급을 타서 부모님께 드렸는데, 어머니(강순자 씨)께서 곧바로 5년 만기 적금에 들어 주셨다. 어쩔 수 없이 그때까지는 열심히 양궁에 매달리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강훈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실업 첫 무대인 2001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개인 종합 패권을 거머쥐었다.
(상)편에서 전술한 바 있듯, 이후엔 순풍에 돛 단 듯 내달리며 '박성현 천하'를 이룩했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첫 번째 그랜드슬램을 완성할 때까지 세계 양궁계에 자신의 이름을 금빛으로 깊숙이 아로새겨 갔다.
◇ "베이징 올림픽 개인전 결승전은 지금도 분하고 쓰라려"… 또다시 그랜드슬램 금자탑은 쌓아
박성현은 베이징 올림픽 개인전 결승 한판은 생각하기조차 싫다. 개인전 시상식이 끝난 뒤, 박성현(오른쪽)이 윤옥희(동·왼쪽), 장좐좐(張娟娟·금)과 함께 선 모습이다. 대한양궁협회박성현은 2001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래 2008년까지 무풍지대를 달려왔다. '양궁 한국'에서, 8년(이하 햇수 기준) 동안 줄곧 태극 마크를 달려면 숱하게 도사린 걸림돌을 걷어 내야 하는 실로 어렵고 힘든 일이다. 특히, 여자 양궁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큰 고비 없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태극 양궁'의 성가를 드높이며 국위를 선양했다. '양궁 = 한국'의 등식이 성립하는 데, 대표 주자로 맹활약한 그였다.
그런 그에게도 가슴 아픈 순간이 있었다. 2008 베이징(北京) 올림픽 개인전 결승 한판에서 당한 쓰라린 패배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지금도 가슴속 한쪽에 남아 있다.
2008년 8월 14일 올림픽 그린 양궁장에서, 여자 개인 결승전이 펼쳐졌다. 그와 중국의 장좐좐(張娟娟)이 벌인 금메달 쟁탈전이었다.
랭킹 라운드 관문을 1위(673점)로 돌파한 그는 64강전부터 4강전까지 승승장구했다. 반면 27위(635점)로 랭킹 라운드를 넘어선 장좐좐은 적수가 될 수 없을 듯 보였다.
그렇지만 결선 라운드에서 상승세를 타며 나타난 좡좐좐의 뒷심을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홈 관중의 일방적 응원을 등에 업고 8강전에서 주현정(106:101점)을, 4강전에서 윤옥희(111:105점)를 잇달아 울리며 태극 궁사의 천적으로 떠오른 점은 더욱 경계를 요했다.
4년 전 아테네 올림픽 단체전 결승전을 연상케 하듯, 이번에도 마지막 한 발에서 승패가 갈렸다. 그러나 금메달의 향방은 달랐다. 승리의 신은 이번엔 그녀를 외면했다.
109:110점, 1점 차가 빚은 희비쌍곡선이었다.
"단 한 번도 그 경기를 복기해 본 적이 없다. 되돌아보기조차 싫었다."
사실 승패는 생각지 못했던 변수인 관중의 매너에서 갈렸다. 관중은 그가 활시위를 잡아당겼다가 놓는 순간마다 함성을 터뜨리는 몰상식한 작태를 되풀이했다.
그의 아쉽고 안타까움은 한국이 이어 오던 대기록의 맥이 끊어져 더욱 진했다.
"우리나라의 개인전 6연패가 단절된 아쉬움이 물밀 듯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만일 그때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 뒤 10연패의 신화 창출로도 이어질 수 있었을 텐데…."
한국 양궁은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정상에 오른 서향순을 시작으로, 김수녕(1988 서울)→ 조윤정(1992 바르셀로나)→ 김경욱(1996 애틀랜타)→ 윤미진(2000 시드니)→ 박성현(2004 아테네)까지 올림픽 금 과녁 명중의 맥을 이어 왔다. 끊어졌던 금맥은 기보배(2012 런던)가 되살렸고, 장혜진(2016 히우)→ 안산(2020 도쿄)이 잇고 있다.
박성현 감독이 세 딸과 함께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생활체육으로 양궁을 익히는 큰딸(예진)과 작은딸(수진)은 제법 의젓한 폼을 취했다. 아직 어린 셋째 딸(나윤)은 엄마의 도움을 받아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박성현 제공올림픽 양궁 최초의 2대회 연속 2관왕에 도전했던 그의 야망은 스러졌다. 그러나 두 번째 그랜드슬램의 금자탑을 쌓는 데엔 성공했다.
나흘 전에 열린 단체전 결승 무대에서, 그는 주현정-윤옥희와 호흡을 맞춰 중국을 꺾고(224:215점) 우승했다. 두 번째 그랜드슬램 달성의 감격을 누리는 한순간이었다.
2005년 마드리드 세계 선수권 대회(단체전)와 뉴델리 아시아 선수권 대회(개인전)에서 첫 획을 그은 대기록 도전은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개인전·단체전)과 2007년 라이프치히 세계 선수권 대회(단체전)에서 형체가 그려졌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마지막 한 점을 찍으며 완성됐다.
◇ 올림픽 금메달 부부로서 함께 지도자의 길 걷는 행복한 인생 2막
올 7월에 열린 제32회 한국실업양궁연맹 회장기 대회에서, 박성현 감독(사진 맨 오른쪽)은 전라북도청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박성현 제공박성현은 2011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이해엔 감독과 선수를 병행했다. 서오석 감독이 코오롱 남자 양궁팀 창단 사령탑으로 가면서 플레잉 감독직을 소화했다. 2012년부터는 감독직에만 전념하고 있다.
"선수 시절 지도자로 나설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감독님이 팀을 떠나시며 권유해 얼떨결에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21년 동안 줄곧 전라북도청만을 둥지로 삼고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해 왔다. 고향의 양궁 발전에 온 힘을 쏟는 열정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 헌신을 평가받아 전라북도체육회와 군산시체육회 이사로 선임돼 향토 체육 발전에도 애쓰고 있다. 대한양궁협회 이사로 한국 양궁의 비약을 위해 힘을 보탬은 물론이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 부부'다. 2008년 12월, 국가대표팀에서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해 온 선배이자 동료인 박경모와 결혼했다. 1년여간 열애 끝에 밝힌 화촉이다.
공주시청 감독으로 활동하는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한국 남자 양궁의 주축이었다. 1993 안탈리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 남자 양궁 사상 첫 개인전 우승의 쾌거를 이루며 혜성같이 나타난 뒤 오래도록 빛났던 명궁이다.
그 역시 두 차례나 그랜드슬램을 이뤘다. 올림픽 무대에선, 아테네 대회에서 금(단체전)을, 베이징 대회에서 금(단체전)과 은(개인전)을 각각 수확했다.
"같은 지도자로서 서로 고충을 토로하고 문제점을 상의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어 좋다."
그는 서슴없이 부부 감독의 장점을 밝혔다.
박성현 감독(가운데)-박경모 감독(오른쪽) 커플은 첫 올림픽 금메달 부부 해설가로 사랑받고 있다. 박성현 제공둘은 해설가로서도 호흡을 맞추고 있다. 2016 히우(리우) 지(데) 자네이루 올림픽과 2020 도쿄 올림픽 때 SBS 양궁 해설위원을 맡아 인기를 끌었다. 첫 올림픽 금메달 부부 해설가답게 관록을 바탕으로 한 수준 높은 해설은 "무척 인상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지금도 갈증에 차 있다.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게 많다. 그만큼 열정적 삶이다.
"회화·스포츠 마케팅·심리 상담에 관심이 쏠린다. 골프·테니스·수영·스쿠버 다이빙도 하고 싶다."
그는 현재 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 과정을 밟고 있다. 필기시험엔 합격하고 2년간의 실습만을 남겨 놓았다.
지도자와 부부로서 연 그녀의 인생 2막은 현재 진행형이다.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지금까지 성공 스토리를 써 온 그녀의 인생극은 근본적으로 해피엔드(Happy End)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