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NOW]올림픽 금3·은1 박성현, '대기만성 표본'… 양궁 입문 8년간 '無메달'

2001~2008년 유일하게 두 차례 그랜드슬램 금자탑을 쌓은 '신궁'
8년 동안 잠재됐던 '명궁'의 역량, 뒤늦게 분출하며 세계 양궁계 평정
올림픽 금 3개 비롯해 주요 국제 무대에서 12회 우승한 '양궁 지존'
평범한 양궁 입문 동기와 무명의 긴 세월 딛고 화려한 발자취 남겨

대한민국 올림픽 영웅들의 그 시절, 그리고 오늘(4)
두 차례 그랜드슬램에 빛나는 올림픽 3관왕 박성현(상)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5연패를 이룬 ‘태극 여궁사들’ - 윤미진·박성현·이성진(왼쪽부터) – 이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출간 ‘ATHENS 2004’

소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8년여 동안 단 하나의 열매도 수확하지 못했으나 낙담하지 않았다. 기나긴 인내의 세월이었다.

묵묵히 활시위만을 잡아당기었다가 놓기를 거듭할 뿐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운명의 그 날은 불현듯 찾아왔다. 2000년, 신세기가 열리며 다가왔다. 10월 어느 날이었다.

잊을 수 없는 무대인 제81회 부산 전국 체육대회다. 양궁 70m에서 동메달을 땄다.

1992년, 초등학교(군산 소룡) 4학년 때 활을 잡은 이래 첫 결실이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고생으로서 출전한 마지막 무대에서, 극적으로 나타난 전환점이었다. 선수로서 생존할 수 있느냐가 가름된 고비에서, 소녀는 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처럼 2000년대 세계 여자 양궁계를 평정한 '여제' 박성현의 첫걸음은 미미했다. 그러나 '절망의 늪'을 헤치고 나오며 불붙은 기세는 무섭게 용솟음쳤다.

두 번 올림픽 무대에 올라 금 3·은 1개의 대풍을 구가했다. 2004 아테네 대회에선 개인전과 단체전 우승을 휩쓸었다. 2008 베이징(北京) 대회에선, 단체전 2연패를 이루며 개인전 은메달을 수확했다.

올림픽에서 빚어낸 풍성한 금빛 결실은 또 다른 금자탑의 바탕이 됐다. 세계 선수권 대회(4회 4개), 아시안 게임(2회 3개), 아시아 선수권 대회(2회 2개)에서 정상을 석권하며 두 차례씩이나 그랜드슬램을 이루는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신궁(神弓)!' 달리 뭐라 표현하겠는가.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 여자 양궁계에서, 두 번씩이나 그랜드슬래머 옥좌에 앉은 유일한 궁사인 그녀다.

◇ 아테네 올림픽에서 첫 그랜드슬램의 금자탑을 쌓다

박성현 전라북도청 양궁 감독은 담담하게 올림픽 3관왕과 두 차례 그랜드슬램 달성 위업을 되돌아봤다. 전주 = 최규섭 기자

2004년 8월 20일(현지 시각)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 2004 아테네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결승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준결승전에서, 각각 프랑스(249:234점)와 타이완(臺灣·230:226점)을 물리친 대한민국과 중국이 벌인 금메달 쟁탈전이었다.

활시위만큼이나 팽팽한 접전은 끝 간 데를 모르듯 이어졌다. 1988 서울 올림픽 이래 단체전 5연패를 겨냥한 한국의 야망을 꺾으려는 중국의 저항은 완강했다.

중국이 먼저 경기를 마쳤다. 스물일곱 발을 쏴 240점을 얻었다.

한국이 쏠 마지막 한 발만이 남았다. 전광판에 새겨진 스코어는 240:231점, 중국이 9점 차로 앞서고 있었다. 10점을 쏴야만 금메달을 획득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주장 박성현이 사대에 들어섰다. 과녁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선, 섬광이 일 듯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활을 떠난 화살은 과녁을 향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녀는 순간 마음속으로 외쳤다. '끝!'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화살을 날리면서 체득한 감각은 명중을 가리키고 있었다.

10점! 과녁 한가운데에 꽂힌 금메달 적중 화살(241:240)점이었다. 숨을 죽이게 했던 박빙의 대회전에서, 신은 한국을 영광의 주인공으로 택했다.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로 껴안고 금메달의 감격을 만끽하는 박성현-윤미진-이성진 트리오의 얼굴에선, 웃음꽃이 피어났다. 1988 서울 올림픽 이래 5연패(覇)를 이룬 '태극 여궁사들'이었다.

박성현은 아테네 올림픽에서 두 개의 금메달(개인전·단체전)을 수확(왼쪽 사진)하며 첫 번째 그랜드슬램을 이뤘다. 단체전 결승 무대에서, 마지막 한 발을 10점에 명중시켜 우승을 확정하는 순간, 환호하는 모습(오른쪽 사진)이다. 한국사진기자협회 출간 ‘ATHENS 2004’

완벽하게 정복한 첫 번째 그랜드슬램 고지였다. 이틀 전 끝난 개인전에서, 그녀는 금메달을 명중하며 이미 그랜드슬램 위업을 달성했었다. 그녀는 개인전 랭킹 라운드에서 세계 신기록(682점)을 쏘며 일찌감치 등정 채비를 마친 바 있었다.

2관왕에 오르는 찰나, 2001년 첫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3년여 동안 세계 무대를 누비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눈앞을 스쳐 갔다.

◇ '무명'에서 단숨에 '명궁'으로… 국가대표로서 첫걸음부터 용솟음치는 기세 뽐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정상에 오른 한국은 시상대 맨 위에 섰다. 윤미진-박성현-이성진(가운데 왼쪽부터)이 자랑스럽게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출간 ‘ATHENS 2004’

2001년은 박성현에게 잊을 수 없는 뜻깊은 한 해다.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뽑히며 비로소 존재를 드러낸 첫해다.

이해 3월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실업 무대에 데뷔한 그녀는 개인 종합 패권을 거머쥐는 이변을 일으켰다. 거리별 우승조차도 맛보지 못했던 '무명'의 그녀가 연출한 '깜짝쇼'는 양궁계를 아연케 했다.

"전라북도청에 입단하며 혹독한 동계 훈련을 소화한 데서 비롯한 첫 열매맺이였다. '1년만 버티고 그만두겠다.'라고 생각했을 만큼, 너무 힘들었던 담금질이었다."

감내의 열매는 달콤했다. 어렵게 튼 싹은 활짝 꽃을 피웠고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다.

첫 등정을 이룬 기세는 대를 쪼개듯 휘몰아쳤다. 단숨에 국가대표 1진의 한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세계로 줄기차게 뻗어 나갔다.

이때부터 그녀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아테네 올림픽에 앞서 열린 주요 국제 무대인 세계 선수권 대회, 아시안 게임,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명궁의 풍모를 뽐냈다.

태극 마크를 달고 처음 출전한 2001 베이징 세계 선수권 대회는 그 서막이었다. 개인전 결승 무대에서, 열세 살 위의 대선배 김경욱을 제치고 금메달을 수확했다.

2년 뒤, 2003 뉴욕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윤미진-이현정과 짝을 이뤄 단체전 금메달을 품에 안았다. 일본을 크게 물리치고(252:233점) 울린 승전고였다.

세계를 휘어잡았으니, 아시아 마당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03 양곤 아시아 선수권 대회 단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토를 달 수 없는 '박성현 천하'였다.

◇ 걸스카우트를 꿈꾸던 소녀, 기나긴 세월을 바탕으로 명궁의 나래 펴

아테네 올림픽 여자 양궁 개인전 랭킹 라운드에서, 박성현(오른쪽)이 과녁에 다가가 점수를 확인하고 있다. 이 경기에서, 박성현은 세계 신기록(682점)을 명중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출간 ‘ATHENS 2004’

소녀는 걸스카우트(Girl Scouts)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 걸음 늦었다. 이미 정원은 꽉 차 있었다.

특별 활동 시간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소녀에게 담임 교사는 양궁을 추천했다. 다니던 소룡초등학교엔 양궁팀도 있었다.

양궁팀에 적(籍)은 뒀지만, 별다른 의욕은 일지 않았다. 그저 얼굴만 내비치는 시간이 지나갔다.

"교과과정의 하나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처음엔 선배들의 훈련을 지켜만 봤다."

박성현은 담담하게 양궁 입문 시절을 되돌아봤다. 그녀는 "참가할 때마다, 감독 선생님이 간식을 주셨다. 나중엔 미안해서 계속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아테네 올림픽 개인전 메달리스트들이 한자리에서 포즈를 취했다. 금메달리스트인 박성현(가운데)의 좌우로 이성진(은·왼쪽)과 알리슨 윌리엄슨(영국·동)이 섰다. 한국사진기자협회 출간 ‘ATHENS 2004’

지극히 평범한 입문 동기다. 우연히 맺은 연(緣)으로서, 채 10년이 흐르지 않아 세계 양궁계를 지배할 여궁사로 떠오르리라고 그 누가 예상했을까?

군산 월명여중(현 월명중) 시절까지 상위 입상 경력은 전혀 없었다. 군산여고 1학년 때엔, 불운마저 닥쳤다. 뜻밖에도 팀이 해체됐다.

양궁을 계속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 누군가 손길을 내밀었다. 김창훈 전북체육고등학교 양궁 감독이었다. 2학년이 시작된 1999년, 그녀는 전북체고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날개가 돋으려 했다. 비상의 날개를 활짝 펼 그 날은 아무도 모르게 태동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몰랐다. 어마어마한 역량이 잠재돼 있을 줄은 꿈에서조차 생각지 않았다.

힘찬 날갯짓을 하는 데엔, 다시 2년의 나달이 필요했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