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우리가 잊고사는 '축구계 손기정' 김용식, 日은 재조명"(사진 단독 공개·영상)

광복절이면 더욱 생각나는 잊혀진 축구영웅 김용식
김용식, 일제 강점기 시절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
축구로 항일 투쟁을 한 김용식, 일본에서는 '축구의 신' 으로 대접
"광복절 맞아 잊혀진 축구 영웅에서 벗어나기를 기대"


축구역사자료수집가인 베스트 일레븐의 이재형 이사는 2015년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고(故) 김용식 선생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일본 요미우리TV 제작진이 이 이사의 집을 찾은 것이다.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이름을 올린 '축구의 전설을 일본이 찾다니 의외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에 출전한 김용식 선생을 소개하는 일본 방송. 이재형 제공

한편으로는 '우리는 왜? 그를 잊고 살았나!'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이를 계기로 이 이사는 일본사람들만 기억하는 '한국축구의 아버지' 바로 알리기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그러던 중 일본방송을 통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그를 만난다.

김용식 선생이 베를린올림픽축구에서 뛰는 희귀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하는 이재형 이사. 이재형 제공

당시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처럼 김용식도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

'축구계의 손기정' 이라할 수 있는 김용식은 훗날 그의 평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일본 대표선수로 뛰지만 이번 기회에 우리민족이 우수하다는 걸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사람들도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한다. 축구 전문 인터넷 언론사인 풋볼리스트가
김용식 특집취재에서 만난 일본축구협회 관계자도 “베를린팀(1936년 베를린올림픽 일본축구대표팀)은 김용식 선생 없이는 안 되는 팀“ 이라고 까지 했다.

일본 축구가 기억하는 김용식선생을 이야기하는 일본축구박물관 관계자. 풋볼리스트 캡처

일장기를 달고 뛴 아픈 기억을 김용식은 12년 뒤인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푼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한 이 대회에서 노장 김용식은 팀을 8강까지 이끌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선수단이 태극기 아래서 촬영한 단체기념사진, 두번째줄 오른쪽 네번째가 김용식 선수로 사진 하단에 사인까지 남겼다. 이재형

그 당시 느꼈던 벅찬 감동과 축구 강국과의 실력 차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용식은 축구인생 내내 연구하고 기술을 다듬어 우리나라 축구발전에 이바지했다.

1952년 10월 25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은퇴경기를 끝으로 김용식 선생은 현역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52년 10월25일 김용식은퇴경기를 소개하는 안내책자. 이재형 제공


김용식 은퇴경기에 소개된 김용식의 약력. 이재형 제공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를 시작하는 최정민의 발탁이 김용식 선생 작품이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 때는 감독으로 대표팀을 이끌었다.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어록 뿐만 아니라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작성해 선수들 모두숙지하도록 했다는 작전 메모는 지금 봐도 치밀하고 전략적이다.

1954년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김용식 감독이 자필로 작성한 훈련 관련 메모. 이재형 제공


영어로도 작성된 1954년 스위스월드컵 작전메모는 당시 주장이었던 주영광선수의 딸에 의해 1998년 공개됐다. 이재형 제공

이 육필 메모는 40년 넘게 구전으로만 전해오다 스위스월드컵대표팀 주장이었던 주영광 선수의 딸 주소진 씨가 1998년 겨울, 이재형 수집가에게 전달하면서 세상에 공개된 귀중한 자료이다.

1960년에는 지금의 AFC아시안컵 전신인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감독을 맡아 대회 2연패를 이끌었다.

1960년 효장구장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한국팀, 뒷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김용식 감독이다. 이재형 제공

(아시아축구선수권 2연패는) 많은 사회적 이슈를 잠재운 결과였다.

이 대회는 광복 이후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대회였다. 논란도 많았다. 애국선열이 묻힌 효창공원에 경기장을 건설한 문제, 이스라엘과의 경기 중 발생한 수십 명의 관중 부상 문제 등이 그것.

그러나 한국의 우승으로 국민들의 집단 기억 속에는 축구가 국가의 위상이나 지명도를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종목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2년 칠레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 감독을 맡았을 때 직접 쓴 선발 베스트 11 포메이션과 함께 전술, 전략을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는 모습도 공개됐다.

1961년 6월 칠레 월드컵 아시아최종 예선 한,일전을 앞두고 김용식 감독이 작성한 선발 베스트 일레븐. 이재형 제공

자신이 발탁한 스트라이커 최정민을 최전방에 세우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멤버인 수문장 함흥철은 골문을 지키게 한 비밀 작전이 눈길을 끈다.

축구의 인프라가 거의 없던 시절에 실질적으로 축구가 기틀을 잡게 한 한국 축구의 전설은 이렇게 훈련내용부터 포메이션까지 일일이 적어가며 선수들을 지도했다.

1961년 6월 일본 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전술을 설명하고 지시하는 김용식 감독. 이재형 제공

이후 김용식 선생은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팀인 할렐루야축구단의 초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축구로 사랑을 받았던 축구인으로 오직 축구밖에 몰랐던 김용식 선생은 1985년 15평짜리 허름한 아파트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유품도 거의 없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 황해도에서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용식 선생은 7살 때부터 축구를 했다.

경신학교 재학시절에 전 조선축구대회에서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으며 축구선수로 성장했다.

홍콩초청대회에 서울 대표로 출전한 김용식 선수(앞줄 왼쪽 두번째 공을 든 선수). 이재형 제공

그러다 항일 시위였던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돼 퇴학을 당하고 숨어 지내는 등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숱하게 겪기도 했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축구로 풀며 와세다 대학시절의 차별대우도 이겨냈다. 축구에서 만큼은 일본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해 일본 대표로도 발탁됐다.

때문에 김용식 선생은 한국과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같이 헌액된 유일한 축구인이다.

그만의 항일 방식인 축구로 일본과 맞선 김용식 선생을 일본인들은 '축구의 신'으로 불렀다.

김용식선생의 축구화를 소개하는 이재형 이사.이재형 제공

이 재형 이사는 "축구계의 대부를 우리는 너무 잊고 사는 듯 하다. 광복절이 오면 재조명되는 항일 역사에 언제쯤 김용식 선생의 이름도 오를까" 라며 김용식 역사 발굴로 바쁜 광복절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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