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HISTORY]'아! 김득구'… 로프에 새겨진 '사생결단'

높이 날고 싶었던 비운의 복서·로프 잡으며 승부끈 놓지 않은 복서

1982년 11월 14일 챔피언 멘시니에 도전한 김득구의 경기 모습.(사진=자료사진)

한국 복싱 백년사에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비운의 복서. 27세에 삶을 마감한 투혼의 복서. 영화 '챔피언'으로 이름을 다시 알린 복서. 마지막까지 로프를 붙잡으며 승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복서. 우리가 기억하는 김득구다.

필자는 언론에 공개된바 없는 김득구의 비화를 글에 담기위해 트레이너였던 김윤구 관장을 비롯 김득구와 관악구 연립주택 1, 2층에 같이 살면서 형제처럼 지냈던 1977년 밴텀급 신인왕 이상봉, 동양 챔피언 김응식, 익명을 요구한 김득구의 후견인 등을 취재했다.

김윤구 관장은 동아체육관 역사에서 기승전결 흥망성쇠를 현장에서 지켜본 유일한 인물로 후학들에게 존경받는 트레이너중 한분이다.

김득구의 묘비에는 1956년 8월 10일 강원도 고성 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는 1955년 1월8일 전북 군산시 옥구군 옥산면 당봉리에서 부친 이동석 모친 양선녀 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당시 이름은 이덕구(李德九)였다.

복싱에 입문 할때는 또 1959년 8월1일 출생으로 등재돼 그의 이력은 복잡 다난한 가정사만큼이나 생년월일도, 나이도 헷갈린다.

1955년 양띠생인 김득구는 살아 생전 자신의 고향을 강원도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는 2살 때 부친이 타계하고 6살 때 모친이 강원도 고성의 김호렬씨에게 재가하자 이덕구에서 김득구 로 개명했다. 3명의 의붓 형들과 어울리며 그곳에서 거진초등학교를 졸업한다.

그후 속초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김득구는 세월이 흘러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19 74년 3월 무작정 상경해 외판원, 식당 종업원. 철공소 직원 등 여러 일자리를 돌며 험한 세파를 헤쳐 나갔다.

하나의 장벽을 넘으면 또 다른 장벽이 반복적으로 내려 덮는 부평초 같은 신세를 한탄하던 1976년 가을 어느날 운명처럼 마주한 복싱 체육관에서 가난을 탈피할 새로운 희망을 본다.

천호상전 동창생인 김응식, 이상봉과 함께한 김득구(사진 중앙). 조영섭 제공

평소 육상과 축구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김득구는 1977년 3월 서울 신인대회에 출전 4연승(2K0승)을 거두며 LW급 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천호 상전 복싱부에 김응식 이종근 박종팔 이상봉 양일 등과 함께 동기생으로 입학한다.

그해 11월 제1회 김명복배에 L급으로 출전한 김득구는 준결승전에서 부산 동의공고 공대식에서 일방적으로 난타당한 끝에 3회 RSC로 패했지만 이듬해인 1978년 제2회 김명복 배에서는 장윤호(남산공전)을 잡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데 이어 학생 선수권 마저 쟁취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어 같은 해 12월 MBC 신인왕전을 발판으로 프로에 데뷔한다. 하지만 3차전에서 우승자인 이종실에 패해 탈락하고 이후 김종표(경흥체)에 무승부를 기록하며 정체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1980년 7월 필리핀 원정경기에서 후아레스를 9회 KO로 잡으면서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사작했다.

그해 12월 6일 이필구와 국내 L급 타이틀전을 벌인다. 킹스컵 국가대표를 지낸 6승(3KO승)1패를 기록한 이필구와 대결에서 김득구는 3회전이 끝난후 4회전 공이 울리기전 상대방의 코너로 뚜벅 뚜벅 걸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필구에게 눈싸움을 걸면서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돌발행동을 펼친 끝에 판정승을 거둔다.

여세를 몰아 3연승을 거둔 1981년 5월 어느날 동아체육관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체육관 4층 건물에 있는 ㈜대한다업 비서실에 근무하는 당시 21세의 이영미양을 계단을 오르다 알게됐고, 교제를 시작한다.

이영미씨는 사귀는 남자가 있었지만 김득구는 특유의 뚝심으로 교제를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김득구가 이영미와 만남을 계기로 심리적 안정을 찾으면서 장족의 발전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킹스컵 국가대표 출신의 20승(14KO승) 1무 4패를 기록한 임홍규를 4회 KO로 잡으며 상승세를 탄 그는 국제전에서 파죽의 3연승을 달린 후 1982년 2월 극강의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 김광민(20승 9KO승 1무 4패)과 맞대결에서도 9회 한차례 다운을 곁들이며 판정승해 챔피언에 등극한다.

여담이지만 김광민과 대결이 잡히자 김득구는 자취방 벽에 대검을 꽂아놓고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독백을 내뱉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는 경기에서 맞대결할 상대는 누구든지 동업자 정신을 가진 파트너가 아닌 내가 살기 위해 밟고 올라가 제거해야 할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이런 성향의 김득구는 언제가 경기장에서 국가대표 출신의 정택동과 유흥석을 만나자 당신들 나하고 당당하게 한번 맞대결하자고 선전포고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 승부 근성을 보이기도 했다.

82년 11월 공항에서 출국인사를 하는 김득구. 조영섭 제공

1982년 6월 5일 양가 부모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약혼식을 치룬 후 관악구 봉천3동 연립주택 단칸방에 보금자리를 꾸민 김득구는 그해 7월 동양 타이틀 3차 방어에 성공하며 WBA 라이트급 1위에 등극해 챔피언 레이,멘시니 (미국)와 타이틀전을 치르기 위해 11월 원정을 떠난다.

최초의 라이트급 세계 도전이었다.

당시 세종호텔에서 김득구와 합숙훈련을 같이했던 김응식은 "의협심 강하고 승부욕이 남달랐던 득구는 잠잘 때 이를 으드득 갈 정도로 타도 멘시니에 강한 승부욕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1982년의 한국 프로복싱은 1월16일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전에서 최충일이 나바레테에게 11회 역전 KO패를 당한 후 연달아 장정구, 김성남도 타이틀 도전에 실패하는 등 3연패를 당한 암울한 상황이었다.

챔피언 멘시니와의 일전을 준비중인 도전자 김득구. 조영섭 제공

현지에 도착한 김득구는 호텔 1288호실 벽에 '사생결단' 이란 격문을 붙이고 결전을 준비했다. 경기 전날 계체량을 끝낸 후 식사를 마치자 "이제 멘시니 죽이는 일만 남았군" 이라며 결기 가득한 출사표를 던졌다.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비장함 속에 결투를 준비한 셈이다.

24승 19 KO승 1패를 기록한 멘시니는 19 KO승 중 3회 이내에 KO로 승부를 낸 것이 15차례로 초반 승부에 강한 파이터 였다.

82년 라스베가스현지에서 김윤구관장, 김현치 회장과 자리를 함께한 김득구(사진 오른쪽). 조영섭 제공

하지만 18승(7 KO승) 1무 1패의 김득구는 초반부터 화력(펀치력)이 열악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백병전을 치루듯 달라붙어 9회까지 2명의 부심이 동점을 1명의 부심이 멘시니 에게 1점 우세를 채점할 정도로 팽팽한 접전을 펼친다.

그러나 10회 주심의 석연찮은 파올에 의해 균형이 깨지면서 전세가 기울어 결국 기력이 쇠잔해진 14회 19초 만에 터진 멘시니의 일격에 경기는 종료되고 나흘 후 김득구는 불귀의 객이 된다.

안타까운 참사였다.

레이 멘시니와 만난 고 김득구의 아들 김지완씨(사진 오른쪽). 조영섭 제공

김득구가 링에 눕기 전에 로프를 붙들고 일어서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은 과거 춥고 배고팠던 한과 응어리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처절한 몸부림이 무의식중에 표출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득구 사망 후 72일이 지나 모친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7개월 후엔 비슷한 시기에 김득구의 유복자의 탄생과 맞물려 주심을 본 리차드 그린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김득구 사후 30년 만에 김득구 유가족과 상봉한 멘시니는 '김득구는 강하고 투지 넘치는 복서였다'고 회고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27세의 짧은 인생동안 사나이의 기개와 투혼을 링위에서 장엄하게 연출한 김득구. 의지로 뭉쳐진 투혼의 화신치럼 버티던 그의 당당한 모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역 땅에서 산화한 불러도 대답 없는 젊은 넋이여! 편히 영면하소서.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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