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건욱 감독이 진지하게 작전을 설명하고 있다. 최건욱 제공제1막은 불운했다. 대학교(명지) 1학년 때 불쑥 부상의 악령이 들이닥쳤다. 부풀렸던 대성(大成)의 꿈을 어쩔 수 없이 접어야 했다.
제2막은 대반전이었다. 감독으로 변신, 독보적 조련 능력을 뽐냈다. 나이 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고교 축구 마당을 평정했다. '안동고 시대'를 열며 자연스레 '명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제3막이 올라갔다. 또 다시 탈바꿈했다. 대학 축구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우리 나이 예순네 살, 노익장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더 불타오른다.
좌절도 있었다. 영광도 있었다. 그만큼 영욕으로 점철된 '축구 인생'이었다.
마냥 비탄에 잠기지만은 않았다. 늘 환희에 젖어 있지만도 않았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새로운 운명을 개척했을 뿐이다. 최건욱 대신대학교 감독이 좇는 삶의 자세다.
◇ '승부사의 전설'은 끝나지 않았다… 대신대 창단 감독으로 3년 만에 사령탑 복귀
최건욱 감독(오른쪽 끝)이 선수들과 함께 대신대학교 행사에 참석해 소개받고 있다. 최건욱 제공2017년을 끝으로, 최건욱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자취를 감췄다. 30년간(햇수 기준) 벤치를 지키며 고교 축구를 호령하던 용장의 실종(?)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수십 년 동안 그라운드를 지키며 애오라지 축구에 매달렸다. 팀과 아이(선수)들만 생각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다소나마 씻고 싶었다."
팽팽한 긴장의 끈을 늦출 줄 몰랐던 승부사였던 그도 '가족의 정' 앞에서 고심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물러서서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축구계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곳곳에서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탐내는 손길을 뻗쳐 왔다. 감독의 열정을 불살랐던 경북을 중심으로 영남 지역과 부산, 고향인 전북, 멀리 경기도에서도 러브 콜이 쏟아졌다.

경기에 앞서 전의를 다지며 포즈를 취한 대신대 선발 베스트 11 모습이다. 최건욱 제공돌연 사라졌던 그는 홀연 되돌아왔다. 지난해 10월 대신대학교 창단 감독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3년 만의 사령탑 복귀였다.
"평생을 걸어왔던 승부의 길에서 떠나 축구를 잊고 살아가려 했다. 처음엔 홀가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어느 순간 그리움으로 화했다. 무엇보다 자존감을 잃어 가는 듯해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 보루만은 지켰다. 사령탑에서 용퇴의 결심을 굳힐 때 다짐했던 '가족과 함께'였다. 파격적 조건을 내세운 여러 구애의 손길을 뿌리치고 대신대를 택한 까닭이다.
지난날, 그는 가족을 떠나 홀로 안동을 둥지 삼아 안동고를 든든한 반석 위의 '축구 명가'에 올려놓았다. 가족이 있는 대구엔, 종종 주말을 틈타 다녀올 뿐이었다.
"아이들(1남 1녀) 졸업식에도 가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지금도 무척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때문에, 여러 곳에서 감독직을 제의했을 때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듯싶다."
그는 매일 집이 있는 대구와 팀이 있는 경북 경산을 오간다. 팀을 조련하며 쌓이는 정신·육체적 피로를 가족과 정을 나누며 씻어 낸다.
그는 팀을 맡으며 승부사다운 과감한 한 수를 던졌다. '한시적 팀 운영'을 자처했다.
"공식적으로, 아직 창단식을 갖지 않았다. 총장(최대해 목사)께 '올 한 해를 지켜본 뒤 그 성과를 바탕으로 창단을 결정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신생팀인 데다가 선수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점도 걸림돌이다. 지난해 10월, 스카우트가 거의 끝난 시기에야 출범하며 선수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한 경기를 치르기도 빠듯한 14명의 선수로 올 시즌을 치르고 있는 대신대다.
그러나 빼어난 장수의 역량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축구협회(KFA)가 주최하는 U리그 9권역에서, 팀을 5위(3승 1무 4패)로 이끌고 있다. 선수 공급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신생팀 치곤 빼어난, 50% 가까운 승률(43.8%)이다.
전과에 만족해한 학교 측에선 점차 팀에 관심을 가지며 큰 폭의 지원을 약속했다. 먼저 선수 TO를 25명 선으로 확충하고 인조 잔디 구장을 마련키로 했다. 또 선수단 숙소를 임차 아파트에서 기숙사(생활관)로 대체키로 방침을 세우고 이를 추진 중이다. 이 밖에 미뤘던 창단식을 올 연말 또는 내년 초에 갖기로 했다.
◇ '안동고 시대' 활짝 연 명장, 대학 무대에서도 맹위 떨칠 날 머지않아
1996년 전통의 청룡기 대회에서 우승한 안동고의 카퍼레이드 행사가 안동 시내 일원에서 펼쳐졌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차량 앞쪽이 최건욱 감독이다. 최건욱 제공1977년, 이제 막 상아탑의 문에 들어선 청년 최건욱은 쓰러지지 않았다. 부상의 덫에 걸려 선수로서 꽃필 수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새로운 운명에 도전했다. 교사가 돼 후학 양성에 나서는, 곧 지도자로서 선수를 키우는 길로 방향을 바꿨다.
명지대학교를 자퇴하고 전북대학교 사범대학에 새로 들어갔다. 지도자를 향한 장기적 포석으로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1984년, 그는 교사가 됐다. 첫 부임지는 영덕고등학교였다. 그는 곧바로 축구 팀을 조직했다. 특기생으로 이뤄진 팀이 아닌, 동아리 형식의 팀이었다. 이곳에서, 4년간 축구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본분과 자질과 역량을 갈고닦았다.
1988년, 본격적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안동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발령받으면서, 그는 키워 왔던 꿈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물론 안동고 축구 팀 감독으로서였다.
그가 창단 5년째를 맞은 안동고를 새로 지휘하면서, 팀은 환골탈태했다. 꾸준히 전국 대회 4강 문턱을 오르내리면서 강호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1992년, 마침내 전국 무대 첫 정상에 올랐다. 전통의 청룡기 중·고 대회에서 우승하며 포효했다. 안동고 천하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사자후였다. 1996년엔, 최고 권위의 고교 선수권 대회와 청룡기 패권을 휩쓸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2000년대까지 안동고는 고교 축구의 전설이었다. 우승 13회, 준우승 7회를 비롯해 4강 약 50회의 눈부신 발자취를 남겼다.

애제자 김진규 FC 서울 코치(오른쪽)와 포즈를 취했다. 최건욱 제공그가 사령탑에 앉아 있는 동안, 안동고는 '국가대표 산실'로도 자리매김했다. 최윤열을 필두로, 김도균·김진규·백지훈 등 대한민국 축구를 선양하는 데 한몫한 제자들을 다수 배출했다. 2020 도쿄(東京)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국가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정승원도 그의 제자다.
특히,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끈 2006 독일 월드컵 한국 국가대표팀엔, 김진규와 백지훈이 발탁됨으로써 안동고의 성가가 드높아지기도 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현역 프로선수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 K리그 1에선, 정승원(대구) 여봉훈·두현석(광주) 박수일(성남) 등이, ▲ K리그 2에선, 김동진(경남) 유준수(아산) 한지호(부천) 김병오(전남) 박주원(대전) 등이 각각 그라운드를 활발히 누비고 있다.
달도 차면 기운다. 절대 강자 안동고도 시나브로 쇠락해 갔다. 인구의 대도시 유출에 따른 총 학생 수 감소가 원인이었다. 축구팀 TO가 줄어들 수밖에 없으면서, 유지 자체가 어려워졌다.
2016년 7월, 결국 대통령금배 출전을 끝으로, 안동고는 해체의 비운을 맞았다.
그는 마무리에 힘썼다. 자칫 진로를 잃고 방황할지 모를 제자들을 구해 해체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마음에서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해 10월, 같은 안동에 자리한 영문(현 예일 메디텍)고등학교가 축구팀을 창단했다. 그는 1·2학년생 선수들을 데리고 영문고로 둥지를 옮겼다.
그는 그때 이미 지도자로서 물러날 뜻을 굳혔다. 제자(권기원)를 코치로 뽑으며 약속했다.
"팀이 새로 만들어진 만큼 하루바삐 틀을 짜야 한다. 그때까지만 지휘봉을 잡겠다. 어느 정도 틀이 갖춰지면 감독직을 물려주겠다."
2017년 말, 그는 미련 없이 영문고를 떠났다.

‘최제모’(최건욱 감독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의 모임)가 열려 사제지간에 훈훈한 정을 나누는 날이면, 으레 웃음꽃이 피어난다. 최건욱 감독(가운데)이 꽃다발을 들고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최건욱 제공제자들은 이처럼 맺고 끊음이 분명한 스승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2013년, '최제모'(최건욱 감독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의 모임)가 탄생한 배경이다.
현 회장인 김진규 서울 FC 코치가 주축이 돼 만든 이 모임은 매년 12월에 모여 사제지간에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50여 명이 영욕을 함께했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시간엔, 웃음꽃이 피어난다.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서 동기를 부여해 선수들이 지닌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지도자의 본분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안동고를 이끌고 일대를 풍미했던 그의 지도자론은 시대를 관통해 변함없이 진리로 통할 듯싶다. 아울러 그가 대학 마당에서도 명장의 반열에 오를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