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HISTORY]홍수환 극찬 박인규, 65% K0 펀치가 '물펀치' 된 사연

173㎝ 신장서 뿔어져 나오는 메가톤 스트레이트 일품
아마전적 125전 118승 77KO
동료 선수 손찌검 후 흉기에 왼손에 치명적 부상, 이후 펀치력 상실
프로전적 15전 14승 1무 1KO… 22세에 선수 접고 '제2의 인생' 가수 입문

한국 남자 아마복싱은 지난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단 한 개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하고 전원 탈락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와일드카드로 단 한 체급이 출전 한데 그쳤다.

이번 동경올림픽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단 한 체급도 출전하지 못한 것. 이처럼 더 떨어질곳이 없을 정도의 참혹한 현실에 충격을 넘어 대형참사라는 황망한 생각마저 든다.

복싱의 경우 과거 각종 국제대회에서 양궁과 함께 선발전에 뽑히는 것이 올림픽 무대서 메달을 따는 것 보다 어렵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 강세를 보였던 종목이었다.

양궁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우수 인재 발굴, 첨단 장비개발 등 전폭적 지원으로 2016년 리우 올림픽에 이어 이번 동경올림픽에서도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해 집중 조명을 받고있는다.

이에 반해 좌표를 잃고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표류하는 한국 아마복싱은 안타까운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85년 인생은 미완성을 부르는 가수 이진관. 조영섭 제공

지난주 1985년 공전의 히트곡 '인생은 미완성' 이란 곡을 부른 가수 이진관씨, 하남에서 사업을 하는 전직 복서 출신 김남기씨, 전직 레슬러 출신의 건설업 대표 임동술씨 등 3명이 함께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했다.

때마침 체육관을 방문한 전 아마복싱 밴텀급 국가대표인 박인규 (동신체)와 합류해 만찬을 하며 망중한을 즐겼다.

학창시절 복서가 꿈이었던 가수 이진관. 조영섭 제공

부초를 부른 박윤경, 목로주점을 부른 이연실과 함께 군산 출신의 가수 트로이카로 불리는 이진관. 그는 본래 복싱과 씨름에 두각을 나타낸 멀티체육인이다.

중학교 졸업후 이리 농고에 씨름 특기생으로 진학이 결정되자 프로복서로 전향하기 위해 상경해 체육관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항로(航路)를 변경했다. 그는 1980년 TBC 주최 젊은이 가요제에 자신이 작곡한 '그날을 기달리며'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놨다.

이후 5년의 무명생활을 딛고 1985년 초반 서정적인 멜로디에 시적인 가사가 가미된 '인생은 미완성' 이란 곡을 발표했다. 이 곳은 KBS 간판 순위 프로그램인 '가요톱텐'에서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 구창모의 '희나리' 이동원의 '이별 노래' 등 수많은 히트곡을 제치고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KBS 가요대상에서 작사 부문 대상과 카톨릭 가요대상 PCI 최고인기가요 대상을 연속 수상했다. 이에따라 이진관은 가수로서 입지를 굳혔다.

필자는 이진관씨를 볼때 마다 '인생이란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속도가 아니라 방향' 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이진관의 이같은 성공 비결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활동한 5년 동안 도끼를 찍는 시간보다 도끼날 가는 시간에 심혈을 기울여 매진한 덕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매니저와의 불화로 더 이상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노랫말처럼 '부르다 멎는 노래'가 되고 말았다,

필자가 이진관의 가수 인생을 복싱 관련 글에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한 복서를 잠시나마 기리기 위함이다.

1958년생 전북 군산시 옥구군 출신의 이진관의 행보를 보면 옥구군 옥산면 당봉리 태생의 고(故) 김득구가 생각난다,

김득구는 강원도 거진을 거쳐 서울로 상경, 맨주먹으로 부와 명예를 얻은 케이스다.

인생 유랑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그도 이진관의 바로 인근 옆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공통점이 있었다.

사진 좌측부터 김남기, 박인규, 이진관, 임동술. 조영섭 제공

이날 이진관씨 등과 함께 저녁을 한 전 아마복싱 밴텀급 국가대표인 박인규 (동신체)씨도 복서에서 가수로 전향한 케이스다.

1956년 전남 화순 출신으로 1972년 상경해 남영동 동신 체육관에서 박찬희, 임병진, 김정철과 함께 운동을 했다.

박인규는 대표 사범 이한성 사단의 황태자로 통했다. 그는 173Cm 키에서 호랑나비처럼 훨훨 날면서 때리는 메가톤(Megaton)급 스트레이트가 일품이었다. 그를 지켜본 홍수환은 한국복싱의 미래라고 예견할 정도였다.

1972년 서울 신인대회 '밴텀급'에서 우승한 박인규는 불과 1년만인 1973년 대통령배 대회에 서울 대표로 참가, 플라이급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상을 받으며 성인무대까지 석권한다.

그리고 그해 아시아선수권 선발전에서 파죽의 4연승(3KO승)을 거두고 결승전에 올랐으나 김충배(명지대)에 석패했다. 김충배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다.

박인규는 남산공전 졸업반인 1974년 제3회 아시아 청소년대표 선발전에서도 결승에서 박남철(이리 남성고)에 2회 KO승을 거두며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상승세를 탄 1975년엔 김창석(육군), 황철순(한국화약), 임병진(대우개발), 백종우(대구), 이흥수(성동 중앙) 등 역대급 복서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마치 미장이가 벽돌을 쌓아 올리듯 아성을 구축하며 국내 밴텀급을 평정했다. 그는 제2회 킹스컵 대회(태국)에 국가대표로 출전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해 5월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도 난적들을 잡고 대표로 선발된 박인규는 뜻하지 않은 돌발사고로 스포츠 신문 한 면을 장식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내리막길을 걷는다.

당시 플라이급에서 박찬희를 꺽고 선발된 강희용(대구 구일체)이 한 살 어린 박찬희가 선수촌에 먼저 입촌했다고 선배 대우를 요구하면서 군기를 잡자 이를 지켜본 박찬희와 절친인 박인규가 인근의 점방(店房)으로 강희용을 불러 손 찌검을 하면서 혼낸다.

이에 발끈한 열혈남아 강희용이 병을 깨서 휘들렀고 박인규는 왼손으로 막다가 그만 손을 다쳤다. 피가 수돗물처럼 줄줄 흐르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자 이에 당황한 박찬희는 우사인 볼트처럼 달아났다.

이로 인해 박인규는 퇴촌을 하게 되고 이 사건 후 하드 펀처 박인규는 왼손이 기능을 발휘 못하면서 돌주먹이 물 주먹으로 전락했다. 결국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최종결승에서 숙적 황철순 에 패하면서 아마복싱을 접는다. 125전 118승 7패 77KO의 화려한 전적이었다.

78년 동경에서 무라다와 일전을 치루는 박인규(사진 우측). 조영섭 제공

박인규는 그해 10월 프로에 전향했고, 이후 1978년 4월 박춘하를 잡고 국내 밴텀급 정상에 오른다. 박인규는 6월 일본에 원정, 10전 전승(7KO) 전적의 무라다 에이지로와 일전을 벌인다.

무라다 에이지느 1965년 3월 에델 조프레(브라질)를 잡고 밴텀급 정상에 오른 하라다 이후 맥(脈)이 끊긴 밴텀급 타이틀을 획득할 재목으로 통하던 강자였다.

당시 박인규도 같은 10전 전승을 거뒀지만 앞서 언급한 사고에 따른 왼손 부상으로 KO승은 단 한차례 뿐이었다.

동경 고라쿠엔 체육관에서 열린 이경기는 한차례씩 다운을 주고받는 명승부를 펼쳐 무승부를 기록한다.

경기후 무라다는 자신이 패한 경기라고 솔직하게 시인 했으며, 일본 언론도 세계타이틀전에 버금가는 명승부를 펼쳤다고 찬사를 쏟아냈다.

이후 전열을 추스린 무라다는 1978년 12월 동경에서 한국의 김영식을 꺽고 동양 밴텀급 정상에 올라 12차 방어에 성공했는데 그중 그와 맞대결한 한국의 문명안, 오용환, 박종철, 오동렬 같은 중견급 복서들도 총맞은 노루처럼 나가떨어지면서 11차례 KO 승을 장식하며 건재를 과시한다.

당시 밴텀급 1위까지 치고 올라간 무라다는 1980년 WBC 밴텀급 챔피언 루페 핀토르(멕시코)와 무승부를 기록한후 기수를 돌려 WBA 밴텀급 챔피언 제프 챈들러(미국)에 재차 도전했지만 역시 무승부로 타이틀 획득에 실패한 무관의 제왕이었다.

싸움닭을 뜻하는 밴텀(Bantam)은 실제 싸움닭 같은 조프레, 하라다, 핀토르, 자모라, 홍수환, 자라테, 올리바레스 무수한 복서들이 출연한 황금의 체급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인규는 WBA Jr 페더급 챔피언 리카르도 카르도나(콜롬비아)와 대결이 성사 직전에 MBC 방송사 소속이던 정순현에게 바통이 넘어가자 1978년 12월 오동렬 전을 끝으로 15전 14승 1무를 기록하고 복싱을 접는다.

평소에 소망이었던 가수로 전향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나이는 만 22세의 약관이었다.

대뷔곡 흙수선화를 열창하는 복서 박인규. 조영섭 제공

박인규는 이후 광진구에서 라이브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저음에 호소력 있는 음색으로 신곡 흙수선화, 애수의 터미널을 발표하는 등 가수로 입문했다.

최근 '흙수선화란 곡이 마치 조용필의 8집 앨범에 소리 없이 묻혀있던 상처란 곡이 뒤늦게 히트인 것 처럼 각광을 받고 있다.

한편 밝고 진취적인 성품의 이진관도 그간 노래교실을 열어 성황을 이뤘고 이후 직접 작사 작곡한 '오늘처럼', '인생 뭐있어', '영자만 보여요'를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새롭게 인생에 재도전하는 두 사람이 이진관의 '인생의 미완성'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길' 기대한다.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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