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NOW]'우생순' 주역 오성옥의 진행형 열정… '첫 단일팀 사령탑'(하)

은퇴 후 복귀… "핸드볼을 잊을 수 없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까까지 걱정"
"국가의 부름에 응한 이상 온 힘을 다 쏟아야"
"29년 선수생활, 강희동·정형균·임영철 감독 등 3명이 영원한 스승"
지난 4월 SK 슈가 글라이더스 지휘봉 잡고 새로운 목표 향해 매진 중

대한민국 올림픽 영웅들의 그 시절, 그리고 오늘<2>
하계 올림픽 여자 최다(5회) 출전 '핸드볼 불세출 레전드' 오성옥<하>


‘태극 낭자 군단’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핸드볼에서 금을 수확하며 2연패를 이뤘다. 위 사진 가운뎃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아래 사진 가운뎃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오성옥이다. 오성옥 제공

1990년대 후반부 초기에 한국 여자 핸드볼은 천하무적이었다. '정형균 체제'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항했다. 연전연승의 항해에, 암초는 없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태극 낭자 군단'을 이끌고 금메달을 일군 정형균 감독은 3년 만에 다시 사령탑에 복귀했다. 1995 오스트리아·헝가리 세계 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단행된 사령탑 교체였다.

정 감독은 세계 선수권 대회와 올림픽 우승을 과녁으로 삼았다. 세계 선수권 대회 첫 정상과 올림픽 첫 3연패라는 '위대한 도전'이었다.

그 열망의 화살을 명중할 궁사엔 '선봉장' 오성옥이 손꼽혔다. 과감한 드라이브인과 가공할 중·장거리포가 장기인 그녀의 공격력이 정점을 향해 상승 곡선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1년 선배 임오경과 호흡을 이뤄 펼치는 콤비 플레이는 당대 세계 으뜸의 공격 루트로 평가받았다.

세계 선수권 대회 첫 적중의 꿈은 이뤄졌다. 오성옥-임오경 듀오를 비롯한 태극 낭자 군단은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단숨에 대를 쪼개는 기세였다. 그 누구도 용솟음치는 상승세를 막을 수 없었다. 예선리그 4승, 결선(16강~결승) 4승, 거침없이 8연승을 내달리고 정상을 밟았다.

이제 남은 과녁은 올림픽 3연패였다. 대야망은 구현될 듯싶었다. 8개월 앞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나타났듯, 뚜렷한 적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에,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는 단연 한국이었다. 4년 전 금을 일궜던 바르셀로나 멤버가 6명(오성옥·임오경·홍정호·한선희·문향자·박정림)씩이나 그대로 건재하다는 점도 이런 일반적 전망에 힘을 실어 줬다.

마지막 한 점을 찍기 전까지 예상대로였다. 4연승을 질주했다. 준결승전에서, 헝가리를 열네 골 차(39:25)로 대파할 만큼 한국은 막강한 전력을 뽐내며 마지막 대회전으로 나아갔다.

1996년 8월 3일 조지아 월드 콩그레스 센터, 대망의 결승 한국 대 덴마크전이 펼쳐졌다. 한국의 3연패냐, 덴마크의 첫 우승이냐를 가름할 한판이었다.

전반전(30분)이 끝났을 때, 승부의 저울추는 한국으로 기우는 듯했다. 한국이 네 골 차(17:13)로 앞섰다.

그러나 경기가 종반으로 갈수록, 승패의 향방은 묘연해졌다. 한국이 체력 저하를 드러내면서, 덴마크의 추격이 거세졌다. 29:29, 승패를 연장전(10분)으로 미뤘다.

화살은 과녁 반보 앞에서 날아가던 방향을 바꿨다. 33:37, 아쉬운 패배였다. 3연패의 꿈은 스러졌다. 아울러 세계 무대 연승 기록은 13(1993 노르웨이 세계 선수권 대회 11·12위 결정전 1승 포함)에서 끊겼다.

◇ 은퇴→ 1년 공백→ 복귀 거치며 절정기 맞아… 일본 무대에서 팀을 7연패로 이끌어

히로시마 메이플 레즈 시절, 수비 숲 사이로 위력적 장거리포를 터뜨리는 모습이다. 오성옥 제공

오성옥은 고심했다. 코트에 남느냐 떠나느냐의 갈림길에서,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번민했다. 이미 두 번의 올림픽(바르셀로나·애틀랜타 대회)에서, 금·은 과실을 각각 한 개씩 따내 뚜렷한 성취 욕망이 일지 않던 시기였다.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택한 길은 은퇴였다. 고별 무대는 1996 큰잔치(현 코리안리그)였다.

"결혼 그리고 이어진 출산으로, 핸드볼에 전념키 힘들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육아에 힘쓰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1997년, 그녀의 모습은 더는 코트에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1년이 지나갔다. 그녀는 돌아왔다.

"핸드볼을 잊을 수 없었다. 이러다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흉금을 터놓는 사이인 임오경 히로시마 메이플 레즈(현 이즈미 메이플 레즈) 감독에게 근심을 밝혔다. 돌아온 대답은 "코트에서 다시 열정을 불태워라. 어서 빨리 일본으로 건너오라."였다.

자연스레 복귀 무대의 서막은 일본에서 올라갔다. 17년간 이어진 해외 선수 생활 첫 막이었다.

1년의 공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눈부신 활약상이 펼쳐졌다. 선수로도 뛰는 임 플레잉 감독과 함께 빚어내는 플레이가 코트에 무섭게 휘몰아쳤다.

진출 첫해, 팀을 1998-1999시즌 일본리그(JHL)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 전 시즌 4위에 머물렀던 메이플 레즈는 상상 이상의 '오성옥 영입 효과'에 열광했다.

끝이 아니었다. 일과성이 아닌, 연속성 태풍이었다. 2004-2005시즌까지 이어진 7연패의 싹쓸바람이었다. 태풍 '오성옥'을 앞세운 메이플 레즈의 전성시대였다.

개인상 석권은 압권이었다. 특히, 1998-1999시즌과 1999-2000시즌엔, MVP(최우수 선수)·득점왕·어시스트왕을 모두 휩쓸었다. 베스트 7 센터백 자리는 일본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21세기를 연 2000년, 그녀는 플레잉 코치로 재계약했다. 지도자로서 첫걸음이었다.

◇ 아테네 올림픽에서 '우생순 신화' 창출… 80분간 박빙의 대접전, 감동 빚은 한 편의 연극

2004 아테네 대회에서. 한국 여자 핸드볼은 역대 올림픽 최고의 명승부를 연출하며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을 결실했다. 그때의 감동적 장면은 2008년 1월 개봉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재연됐다. 대한핸드볼협회 제공

무릇 감독이라면 '오성옥 바람'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자신은 애틀랜타 대회를 끝으로 올림픽 열망을 접으려 했지만, 감독의 처지에선 절대적으로 품에 안아야 할 존재였다. 그녀가 30대 중반까지 올림픽 마당을 세 번씩이나 더 밟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올림픽에 나서는 감독님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국가의 부름에 응한 이상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국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성적을 올리는 데 큰 힘이 됐다."

그녀가 '추억의 강'에 빠져들 때마다, 가슴이 아려 오는 올림픽이 있다. 2004 아테네 대회다. 온 국민을 '감동의 바다'에 빠뜨린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신화'가 탄생한 무대다.

2004년 8월 29일 헬리니코 아레나에서, 역대 올림픽 여자 핸드볼 최고의 명승부가 펼쳐졌다. 올림픽에서, '숙명의 맞수'가 된 한국과 덴마크가 금메달 대회전을 벌였다.
누가 올림픽 여자 핸드볼 최초 3회 우승의 주인공이 되느냐를 가름할 한판이어서 더욱 뜻깊은 한판이었다.

이미 예선리그에서 만나 승패를 가르지 못했던(29:29) 두 팀의 격돌은 팽팽하기만 했다. 전·후반 60분 동안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25:25).

연장전(10분)에 들어가서도 한 치도 양보 없는 기 싸움은 마찬가지 양상이었다.

4:4(29:29), 승패의 저울추는 요지부동이었다. 2차 연장전(10분)에 들어갔다. 매한가지였다. 신도 승패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었는 초접전이 거듭됐다. 5:5(34:34), 저울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80분의 격전은 무위로 끝났다. 승부 던지기만이 남았다. 비로소 저울추가 움직였다. 2:4(36:38), 안타깝고 아쉬운 한국의 석패였다.

태극 낭자들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맏언니' 오성옥은 동생들을 하나씩 껴안으며 달랬다. 그 순간에도, 가장 먼저 슬픔을 가라앉히고 동생들의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맏언니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 '지도자 인생'도 꽃피워…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긴 지도 철학 주효

2016년 고국으로 돌아온 첫해, 청소년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오성옥 감독(가운데)은 제6회 세계 여자 유스(U-18)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을 3위에 올려놓았다.

오성옥의 자질은 천부적이다. 그만큼 성장세가 가파랐다. 나날이 다달이 자라거나 발전했다.

초등학교(대전 삼성) 4학년 때인 1982년 어느 날, 그녀는 핸드볼에 발을 들여놓았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 하나로, 핸드볼과 연(緣)을 맺었다. 여고(대전 동방) 1년 때 국가대표 겸 주니어대표로 발탁된 데서도, 그녀의 기량 성장 곡선 기울기가 얼마나 가파랐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2011년까지 29년 동안 선수 생활에서, 세 분의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건 행운이었다. 초등학교 때 기본기의 중요성과 함께 선수로서 갖춰야 할 정신 자세를 강조하신 강희동 감독님, 핸드볼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완벽한 기술을 구사하게끔 지도해 주신 정형균 감독님, 믿음으로 지닌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임영철 감독님은 본받아야 할 사표(師表)이시다."

지도자의 길에 나선 이래 그녀는 이를 바탕으로 제자들을 육영하고 있다.

그녀는 일찌감치 20대부터 지도자와 선수 생활을 병행했다. 메이플 레즈(2000~2006년)→ 오스트리아 히포 니더외스터라이히(히포 방크·2006~2010년)→ 메이플 레즈(2010~2011년)에서, 선수로 활약하며 지도자 경력을 쌓은 바 있다.

그녀는 201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축적된 힘은 한국에서도 곧 분출됐다. 대한핸드볼협회(KHF) 전임 지도자로서 여자 청소년대표팀을 이끌고 승승장구했다.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을 2회 연속(2017 인도네시아·2019 인도) 정상에 올려놓았다.

세계 무대에서도, 그녀의 지도력은 빛났다. 세계 여자 유스(U-18)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잇달아(2016 슬로바키아·2018 폴란드) 3위로 이끌었다.

오성옥 IHF(국제핸드볼연맹) 애널리스트 겸 인스트럭터는 뛰어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IHF 관계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오성옥 제공

그녀는 핸드볼 기술 개발 및 전파에도 힘쓰고 있다. IHF(국제핸드볼연맹) 애널리스트 겸 인스트럭터, KHF 기술위원으로서 핸드볼 발전에 정성을 다한다.

오성옥 SK 슈가 글라이더즈 감독이 훈련을 지휘하는 모습에선, 선수 시절 왕성했던 활동력이 느껴질 만큼 적극성이 엿보인다. 최규섭 기자

지난 4월엔 SK 슈가 글라이더즈 지휘봉을 잡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 5년 만에 첫 단일팀 사령탑에 앉았다.

핸드볼을 향한 그녀의 열정은 새롭게 불타오른다. 새롭게 나타난 또 하나의 목표가 그녀의 야망을 부풀린다.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는 한, 열망은 이뤄지리라는 굳은 믿음으로 충만한 그녀의 앞길은 장밋빛 꽃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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