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HISTORY]올림픽 메달은 천운?… 84 올림픽, 안영수·박용운의 반전 운명

게으른 천재 복서 안영수 엉겁결에 은메달
천재 고교복서 박용운, 프로에 입문하며 올림픽 꿈 접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020 도쿄올림픽이 시작됐다.

코로나19로 1년 늦게 개막된 것부터 이번 올림픽은 역대 가장 이변이 많은 대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올림픽 복싱 도전사에도 숨은 이변이 많다.

얼마전 필자의 체육관을 찾아 온 1984년 LA올림픽 웰터급 은메달리스트 안영수(한체대)와 1982년 볼리바르컵 대회 페더급 동메달리스트인 박용운(용인대)사이에도 올림픽을 두고 뒤바뀐 운명이 있다.

1983년 청소년 대표출신의 박용운과 안영수(사진 오른쪽). 조영섭 제공

시작은 필자가 이들과 인연을 맺은 38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1983년 7월7일 부산구덕 체육관에서 폐막된 제2회 세계 주니어 복싱선수권(11월 도미니카)대회 파견선발전. 이 대회에 F급 필자와 Fe급 박용운, W급 안영수가 각각 선발되면서 부터다.

선발진은 한화 김승연 회장이 설립한 왕십리의 한국화약 전용체육관에서 한 달간 합숙훈련을 했다.

이청하, 이상덕 코칭 스텝의 조련속에 한달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체계적인 훈련으로 40년 지기들은 비로소 복싱판에서 알을 깨고 나오는 변곡점(變曲點)을 맞았다.

왜냐하면 이 훈련을 마친 뒤 8월에 열린 로마 월드컵 국가대표 선발전(플라이급)에서 필자는 우승컵을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4강에서 최천섭(경남대)을, 결승에서 권채오(한국화약)를 잡고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선발된 복서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부산 금성고 3학년인 박용운 이었다.

깨끗한 마스크에 차분한 성품의 박용운은 1978년 해운대중 2학년때 복싱에 입문해
제1회 회장배 대회 (플라이급)우승과 함께 베스트 복서로 선정되면서 복싱신동으로 불려진 사우스포(왼손잡이 선수) 였다.

1980년엔 부산체고에 입학 했지만 함께 시험을 치룬 절친 동료가 탈락하자 일년 유급해 1년 후 그 친구와 함께 부산 금성고에 동반 입학을 한 의리의 사나이기도 했다.

박용운은 1년 유급할 때 부산 광명체육관 에서 훈련을 했는데 마침 전남 고흥에서 온 오광수(한국체대)와 같이 훈련을 했다.

역시 사우스포인 오광수마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박용운의 복싱스킬은 현란했다.

오광수는 후에 김광선과 쌍벽을 이루며 1985년 월드컵 금메달, 1986년 세계선수권 동메달, 198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간판 복서다.

박용운은 1981년 제62회 전국체전에서 전남의 문성길을 잡고 올라온 전북의 최주영을 꺽고 고등부 밴텀급에서 금메달은 획득했는데 이 금메달은 고등부 부산팀의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박용운은 앞서 부산선발전에서 서윤교(가야고)를 제압하고 본선 티켓을 확보했는데
서윤교는 1981년 5월 김명복배 밴텀급 우승과 함께 허영모(순천 금당고), 안영수(서울체고)와 함께 최우수복서로 선정된 복서였다.

박용운의 당시 기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준 결과다.

이 무렵 부산 대표였던 국보급 복서 장정구가 박인태 (동아대) 이후 부산 출신 최고의 사우스포라고 박용운을 추켜 세울 정도였다.

사우스포 박인태는 정통파 복서인 장정구에게 자신의 사우스포 기술을 전수(傳受) 한 복서로 국가대표로 박찬희를 한차례 잡은 복서였다.

1982년 5월 박용운은 김명복배 (페더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3차 선발전에서 결승에서 김용호(부산 동아대)를 잡고 본선에 진출 박기철과 맞대결, 2ㅡ3으로 분패한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서 박기철과 일전을 펼치는 박용운(사진 왼쪽). 조영섭 제공

박기철은 1979년 세계청소년대회(요꼬하마) 우승자이자 1981년 뉴욕 월드컵 동메달 리스트로 한국 아마복싱의 간판스타 였다.

당시 이경기를 참관한 동아일보 이계홍 기자는 박기철의 네임 벨류에 의해 기울어진 경기라 평하며 고교생 박용운의 선전을 높이 평가했다.

이후 1982년 9월 제1회 시몬 볼리바르컵 (베네주엘라)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박용운은 준결에서 푸에르 토리코의 오르티지에게 완승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졸업반이었던 1983년도에도 박용운은 킹스컵 국가대표인 추경호(환일고)를 2회 예리한 카운터 로 2회 KO시키면서 제7회 김명복배 2연패를 달성하는 등 부동의 고교랭킹 1위의 복서였다.

세계청소년 선발전에서도 원점도 (한영고)를 일방적으로 난타하며 쾌승을 거두고 김기택(수원대), 최희용 (부산체고)과 함께 우승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유망주의 앞길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온다.

세계 대회 출국을 앞둔 박용운에게 출전 자격이 변경돼 문제가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

참가자격이 1964년 11월 이후로 변경되면서 1964년 10월생인 박용운은 안타깝게 자격을 상실하고 만다.

1984년 용인대에 입학한 박용운은 국제무대에 설 기회를 다시 한번 놓친다.

당시 페더급 대표인 박기철(한국체대)의 탈퇴로 무주공산이 된 이 체급에서 LA 올림픽 출전이 유력 했지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프로행이 결정돼 그해 3월 데뷔전까지 치루며 아마추어선수의 꿈인 올림픽 무대 진출은 끝내 무산된다.

이후 박용운은 IBF 세계랭킹 1위에 등극하면서 29전 26승(15KO승) 1무 2패의 전적를 기록하다 96년 6월 복싱을 접는다.

프로복싱 IBF 세계랭킹 1위에 올랐던 박용운. 조영섭 제공

박용운과 동갑내기인 안영수는 낙천적인 성품을 지닌 영혼이 수정처럼 맑은 복서였다.

하지만 아마복싱 대표 선수중 권현규(목포대), 김태호(경희대)와 함께 3대 게으른 복싱 천재라 불릴만큼 열정과 짐념이 부족했다.

그는 마치 빈센트 반고흐가 영혼의 편지에서 '나에게 최종목표가 무엇이냐고 묻지마라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갈 뿐이다' 라고 갈파한 어록처럼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선수 생활을 한 대표적인 복서였다.

태릉중에 다니던 1978년 제3회 김명복배 라이트 웰터급에서 신춘식 (여수중). 이해정(대천서중), 윤영환 (중대 부중)과 함께 우승을 차지한 안영수는 80년 서울체고에 입학해서는 방승현 이해정과 트로이카를 이뤘다.

그는 1981년 제5회 김명복배 62회 전국체전에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탄력을 받은 안영수는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출전했지만 정용범 (동국대)의 장벽에 막혀 입상이 좌절된다.

그해 10월 대표 2진으로 참가한 핀란드 템머 국제복싱 대회 준결승에서 소련의 코나프 예프에게 RSC로 패했지만 값진 동메달을 획득한 그는 1983년12월 제11회 아시아선수대회(오끼나와)에 출전,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덤으로 군면제 혜택을 받자 복싱에 대한 남아있던 열망마저도 연기처럼 사라진다.

1984년 4월 킹스컵대회 출전해 역시 소련 선수에 패해 탈락한 안영수는 LA 올림픽선발전을 앞두고 출전하기가 싫어 일부러 계단에서 뛰어내려 발목부상을 입으려고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어쩔수 없이 출전한다.

그런데 관심도 없던 선발전에서 정용범<동국대>을 꺽고 LA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자 안영수의 사보타주(Sabotage:태업)는 더 교묘해진다.

태릉선수촌에서 새벽에 실시하는 인터벌 훈련시간에 중간에 행방불명 됐다 나타나는 등 훈련태도가 낙제점이었다.

이렇게 복싱에 흥미를 잃고 끌려가다시피 1984년 7월 올림픽 무대에선 안영수는 1차전에서 수단선수에 판정승을 거두며 생각지도 않은 올림픽 메달의 길에발을 들여놓게 된다.

하지만 2차전 상대는 제2의 레너드라 불리는 1982년 세계선수권자 마크 브릴랜드(미국)였다.

13살에 복싱에 입문해 4년 연속 뉴욕 골든 글러브상을 탄 마크 브릴랜드는109승<73KO승>1패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한 톱 복서였다.

그 당시 LF급 첫 경기에서 미국의 폴 곤잘레스에게 석패한 김광선이 출전을 앞둔 안영수에게 빨리 경기 끝내고 설악산에 함께 가자고 할 정도로 승산은 희박했다.

하지만 네팔 선수의 실격으로 대진표가 온통 뒤바뀌는 바람에 브릴랜드와 다른 대진이 편성되는 운이 따랐다.

네팔 선수가 1차전에서 부전승으로 올라온 푸에르 토리코 선수와 싸우게 돼 있었지만 계체량에서 실패해 푸에르토리코 선수는 2회 연속 부전승을 거두게 됐다.

하지만 국제복싱연맹(AIBA)은 규정 7조에 의거 2연속 부전승을 인정하지 않아재추첨을 하면서 대진운이 뒤바뀐 것.

브랠랜드가 속한 A조에 카나다의 웨인 고든. 푸에르 토리코의 레이에스, 루마니아의 오브레하, 멕시코의 게나로, 레온, 이태리의 부루노 등 강력한 우승 후보들이 집결했지만 안영수는 비교적 약체들로 편성된 B조에 속했다.

결국 안영수는 터키의 온소이, 핀란드의 조니 니만 등을 잡고 결승에 안착하는 일이 벌어졌다.

복싱을 접으려고 멀쩡한 다리를 괴롭히던 게으른 복서 얀영수는 마침내 결승까지 올라 브릴랜드와 격돌한다.

84년 LA올림픽 웰터급 결승에서 미국의 마크 브릴랜드와 격돌하는 안영수(사진 왼쪽).조영섭 제공

결승전에서 그는 2회 한차례 다운을 당하는 등 힘든 경기끝에 금메달을 내줬지만 제우스 신(神)의 어쩔 수 없는 배려(?)인지 귀한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처럼 올림픽 무대에서는 메달 고지로 가는 길에 숱한 사연과 감동이 따른다.

84년 LA올림픽 복싱에서은메달을 획득한 안영수의 개선 장면. 조영섭 제공

개선한 안영수는 정부와 체육회, 김승연 복싱협회장 등이 지급한 6천만 원 상당의 포상금까지 받는다. 당시 교사 월급이 40만 원 선임을 감안 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한편 곡절 많은 사연으로 올림픽행에 제동이 걸린 박용운은 은퇴 후 부산에서 장정구 복싱클럽을 운영하며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고 일본에서 사업을 하다 귀국한 안영수는 당구장을 운영하다 접고 현재는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

올림픽을 사이에 두고 희비 쌍곡선을 그린 두 복서와의 추억소환으로 40년지기들의 이야기꽃은 오래도록 지지 않았다.

조영섭 문성길 복싱클럽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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