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신을 다한 역작인 '탈' 국내 공연에서, 이춘우 KTA 국가대표 시범공연단 단장(가운데)은 몸소 무대에 올라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이춘우 제공2006년 12월 19일 저녁 전북대학교 삼성 문화회관 대극장, 4막으로 구성된 '신화 Taekwon(태권) 2013 Episode(에피소드)' 초연이 펼쳐졌다. 1시간 10분간에 걸친 공연은 감동과 열광의 연속이었다. 막이 내리자,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은 환호와 갈채를 보내며 흥분에 휩싸였다.
새로운 '시범문화'의 지평을 연 공연이었다. 태권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신세계가 담긴 작품이었다. 격파와 품새가 주종을 이루던 단순한 '체육관 시범'은 연극적 요소가 가미되며 '무대 공연예술'로 승화했다.
시범문화의 발전적 탈바꿈을 지향한 KTA(대한태권도협회·당시) 국가대표 시범공연단의 걸음은 무척이나 산뜻했다. 2013년 세계 태권도의 성지로 태어날 무주 태권도공원(현 태권도원)의 성공적 태동을 기원하려는 제작 의도를 멋지게 구현해 냈다.
감개무량했다. 절로 붉어지는 눈시울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작품의 시작(구상)부터 끝(상연)까지를 총괄 지휘했던 지난 수개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이춘우 국가대표 시범공연단 단장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약 20년 동안 열정을 불사른 '시범 인생'에 뜻깊은 한 점을 굵게 찍은 순간이 아니던가.
그가 기울인 혼신의 노력이 깃든 작품, 곧 색다른 옷인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덧입은 태권도 시범은 무척 신선했다. 내용(Story: 시범)과 형식(Telling: 연극)의 어우러짐은 발상의 전환으로, 독특함이 바탕을 이루며 흥미까지 자아낸 시범 공연이었다.
그는 태권 최고수들의 역동적 퍼포먼스와 연극적 요소를 아울러 희망에 가득 찬 무지개를 빚었다. 새로운 문화 콘텐츠의 탄생을 널리 알리며 '국기(國技) 태권도'의 자존감을 한껏 뿜어내는 무대를 연출했다.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태권도가 새 영역의 개척에 힘입어 길이 역사에 빛날 문화임을 입증해 냈다.
◇ '시범 인생극' 외길 걸으며 시범 공연 창안
국기원 시범단원으로 활약하던 1989년, 고공 4단계 격파의 빼어난 시범을 선보이고 있다. 이춘우 제공이춘우 단장은 한국 시범 공연계의 선구자다. 시간을 20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외연을 기존의 시범으로 넓혀도 개척자라 할 만하다.
1987년 국기원이 공식적으로 시범단원을 첫 공개 채용할 때 태권도 시범과 정식으로 첫 연(緣)을 맺은 데서도 엿볼 수 있는 사실이다. 스위스 로잔에 자리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에 파견하는 태권도 사절단 선발 관문을 뚫었다. 오늘날까지 34년간 이어진 '시범 인생'의 서막이었다.
이춘우 단장이 화강암 15장을 깨뜨리는 위력 격파를 선보이고 있다. 이춘우 제공그가 연기해 온 시범 인생극은 크게 2막으로 나뉜다. 1막은 국기원 시범단, 2막은 KTA 국가대표 시범공연단이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1막은 순수한 시범의 테두리 안이었고, 2막은 시범 공연으로까지 확대된 영역이었다.
1막에서, 그의 행로는 비교적 순탄했다. 1989년 이규형 단장이 새로 부임하며 부주장으로 발탁되면서 전기(轉機)를 맞았다. 1990년대 초반엔 주장으로 올라섰고, 중반엔 부단장으로 승격됐다. 2005년까지 계속된 이규형 단장-이춘우 부단장 체제의 첫출발이었다.
두 사람은 태권도 시범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후에 국기원 원장을 역임한 이규형 씨는 시범을 겨루기·품새와 더불어 태권도의 한 영역으로 올려놓았다. 이 초석 위에서, 그는 시범과 연극을 접목한 시범 공연을 창출했다.
◇ 넌버벌 퍼포먼스 '탈'로 전 세계 매혹… 잇따른 창작품 내놓아 시범 공연 위상 굳혀
'탈'은 5년간 국내외에서 시범과 연극이 어우러진 시범 공연의 매력을 한껏 발산했다. 이춘우 제공2008년 KTA 국가대표 시범단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전까지 국기원 시범단에 얹힌 명목상의 허울에서 벗어나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물론 그 주인공은 이춘우 단장이었다. 이미 2006년부터 국기원 시범단 단장으로서, 각종 이벤트에 맞춰 편성·운영된 KTA 국가대표 시범단을 지휘해 오며 2막이 시작됐음을 알렸던 그였다.
따라서 무대는 낯설지 않았다. 그 안에 담을 내용물이 과제였다. 2년 전 무대에 올린 '신화 Taekwon 2013 Episode'에서 공연 예술로서 태권도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그는 시범 공연이 한 걸음 더 나아가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그 날을 향해 매진했다.
2019년 제54회 대통령기 단체 대항 대회 개막식에서, 시범을 마친 KTA 국가대표 시범공연단이 대한민국태권도협회 임원진과 같이 한자리에 모였다. 맨 뒷줄 왼쪽에서 일곱 번째가 이춘우 단장이다. 이춘우 제공"관객의 눈높이는 계속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반면 태권도 기술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기술에만 의존하는 시범만으로선 관객의 욕구를 충족하기가 힘들다. 기술 요소와 공연 요소의 접목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고심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인간 속성의 하나인 호기심에 착안해 해법을 찾았다.
"인간은 누구든지 타인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인간은 이야기 본능을 가진 존재인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라고 하지 않는가. 고대 그리스 서사 시인인 호메로스가 지은 영웅 서사시 「일리아드(Iliad)」가 대변하듯, 이야기는 인류와 함께 연륜을 쌓아 왔다."
태권도 시범에 연극을 접목한 공연이 성공할 수 있었던 근원이었다.
2010년, 고심 끝에 내놓은 역작이 '탈'이었다. 태권도 시범, 전통 무용, 비보이, 타악 연주를 모두 아우른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 비언어 공연)였다. 탈을 도구로 펼쳐지는 선과 악을 주제로 한 갈등과 대립 및 증오와 사랑의 이야기에, 관객은 열광했다.
탈은 국내에선 물론 해외에서도 진가를 높게 평가받았다. 2015년까지 월드 투어에 나서 지구촌 가족을 매혹했다. ▲ 2010년 미국을 시작으로 ▲ 2011년 UAE(아랍에미리트연합), 일본, 유럽(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남북미(미국·브라질), 중국, 베트남, 미얀마 ▲ 2012년 중국, 유럽(벨라루스·스위스→ 스웨덴·오스트리아→ 프랑스·스페인·영국), 싱가포르, 태국, 일본 ▲ 2013년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유럽(헝가리·벨기에·터키), 필리핀, 북중미(캐나다·미국·멕시코), 베트남 ▲ 2014년 투르크메니스탄, 크로아티아, 미국 ▲ 2015년 투르크메니스탄, 미국 등을 순회하며 전 세계를 시범 공연이라는 '매력의 늪'에 빠뜨렸다.
그는 여기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2016년 '킥스(Kicks)', 2018년 '태권 얼라이브(Taekwon Alive)'를 잇달아 내놓으며 시범 공연이 더욱 뿌리내리는 데 온 힘을 쏟아 왔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미진한 마음이다.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한 겸손한 마음가짐에서 비롯하지 않았나 싶다.
"시범 공연은 이제 걸음마 단계를 갓 벗어났다. 여전히 시범 공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투자가 미흡하다. 후세에 남을 만한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체계가 하루바삐 완비돼야 한다."
◇ 후학 양성에서도 뚜렷한 발자취… 아이티고교를 '품새 명문'으로 올려놓아
이춘우 단장(왼쪽 사진)은 2012년 국위 선양과 국가 체육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평가받아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훈(受勳)했다. 이춘우 제공이춘우 단장의 능력은 또 다른 무대에서도 발현됐다. 서울 아이티고등학교 품새팀 감독으로서 빛나는 역량 또한 눈부시다.
2010년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사령탑을 지휘하며 한국 태권도 품새 동량들을 배출했다. 2000년대 국기원 사범연수원 품새 실기 강사로서 『태권도 교본』(국기원 발간)에 수록된 각종 기술 시연 모델을 맡았을 만큼 빼어난 품새 재능을 후학 양성에 쏟아붓고 있다. 태권도를 교기(校技)로 하는 아이티고가 '품새 명문'으로 자리매김한 원동력이다.
한국 품새계를 대표하는 제자들만 해도 손꼽기가 힘들 정도다.
2014 아과스칼리엔테스 세계 품새 선수권대회를 휩쓴 수제자 삼총사와 함께 감격을 나눴다. 왼쪽부터 박광호, 유세빈, 이춘우 단장, 조정현. 이춘우 제공2014 아과스칼리엔테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정상을 휩쓴 박광호(4기, 남자 U-30 개인)-조정현(6기, 남자 주니어 개인·복식)-유세빈(6기, 여자 주니어 개인·복식) 삼총사는 지도자로서 그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꼽히는 수제자다.
2015 광주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수확한 배종범(왼쪽)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이춘우 제공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2연패를 이룬 배종범[5기, 2015 광주~2017 타이베이(臺北)]과 2018 타이베이 세계 선수권 대회 자유 품새 U-17 복식전에서 우승한 윤규성(11기)도 빼놓을 수 없는 애제자다.
2019년에 열린 제29회 용인대 총장기 대회에서, 빼어난 기량을 펼친 서울 아이티고등학교 제자들과 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 줄 가운데가 이춘우 단장, 앞줄 가운데가 윤규성이다. 이춘우 제공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강완진(7기)은 두말할 나위 없다. 강완진은 2018 호치민 아시아 선수권 대회→ 2018 자카르타-팔렘방 하계 아시안 게임→ 2018 타이베이 세계 선수권 대회→ 2019 나폴리 유니버시아드를 잇달아 석권한 '품새 귀재(鬼才)'다.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비롯한 모습의 전체 흐름이 시범이다. 자기 자신부터 솔선수범하는 마음가짐을 닦아야 올바른 시범을 구현할 수 있다."
그가 쌓아 온 '시범론'이다. KTA 국가대표 시범단을 지휘할 때나, 아이티고 품새팀을 가르칠 때나 늘 강조하는 소신이다.
그의 소망은 소박하다. 시범 분야가 안정적 토양에 튼실하게 뿌리를 내리기를 간절히 원한다.
"시범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빨리 도래했으면 한다. 치명적 부상 위험을 잊고 시범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시급하다. 국기 태권도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시범 또는 시범 공연만 한 게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