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HISTORY]주먹 출신 조철제 전 亞복싱연맹 부회장, 북한 IOC위원 가격한 이유는?

남북관계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북 간부에게 주먹 휘둘러
"한국 아마복싱 백년사에 스승같은 존귀한 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복싱대표팀 단장으로 참가한 조철제씨. 조영섭 제공
며칠전 1970년대 한국 아마복싱 중량급 블루칩(Blue chip>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박일천(전매청) 선배와 함께 조철제 전 아시아 복싱연맹 부회장을 만났다.

조 전 부회장은 한국 복싱 역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필자와 동행한 박일천은 1949년 황해도 태생으로 1976년 2월 킹스컵 대표 선발전(라이트 미들급)에서 우승한 후1980년 5월 31세로 은퇴 할때까지 국내에서 104연승을 기록했다. 이는 종전의 유종만(원광대)의 49연승 기록을 2배 가까이 뛰어넘은 대기록이라 할 수있다.

그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과 1977년 아시아 선수권(자카르타),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1979년 뉴욕 월드컵, 1980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와 제9회 아시아선수권대회.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국내 선발전에서 당시 일당백인 나경민(수경사), 김만호. 김현호(한국체대), 임창일(충남), 한혁수(육군), 이홍근(육군) 등과 상대해 승리한 것은 물론, 6차례 국제대회에서 4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복싱 국가대표 출신 박일천과 조철제 부회장(사진 우측), 조영섭 제공

박일천과 함께 조철제 부회장과 오찬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조 부회장은 1935년 서울 출생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당대 최고의 격투기 1인자인 윤창원 선생에게 스트리트 파이터에게 필요한 각종 하이테크한 기술을 전수 받았다.

중학교 시절엔 청량리에 체육관을 설립한 이규환 선생 문하에서 복싱을 체계적으로 수련했다. 그는 서울 장안에서 주먹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청양리에 체육관을 설립한 이규환 선생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복싱 국가대표로 출전 W급에서 8강에 진출한 인물이다. 그의 친조카 이한성은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면서 박찬희 김정철, 박인규, 임병진 등을 양성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대표팀 코치로 참관키도 했다.

문성길 챔프(사진 우측)와 포즈를 취한 조철제 부회장. 조영섭 제공

소년 조철제는 주먹세계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윤창원 선생의 소개로 당시 주먹계의 대부로 통하는 김두한을 소개받아 그 휘하에서 무술 실력을 발휘, 김두환 사단의 핵심전력으로 급부상했다.

중고등학교만 무려 12차례 옮겨 다닌 전력만 봐도 소년 조철제의 유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결혼할 즈음에 김두한은 직접 주례를 챙기는 등 결혼식을 총괄했다. 특히 야인시대에 등장하기도 한 하야시에게 부탁해 조철제를 건설회사 상무로 취직 시킨다.

하야시는 실제는 일본인이 아닌 선우영빈이란 이름의 조선인이었다. 경성의 5개 경찰서 가운데 가장큰 혼마찌 경찰서(현 중부경찰서) 서장이 새로 부임해 오면 부임 인사를 올 정도로 하야시의 세력은 대단했다.

한편 조철제의 아내는 강낙원 선생의 손녀딸이었다. 강 선생은 1934년 1월 20일 조선 권투연맹이 발족할 때 산파 역활을 담당한 그 유명한 전조선 무도관의 사범이었다.

조철제는 1956년 군생할 때 MIG 군사정보 부대에 복싱부를 창설, 전양옥 이용길을 발탁·육성시킨 후 1970년대 들어 대한복싱협회 전무로 임명됐다.

그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부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1977년 아시아선수권대회, 1978년 유고 세계선수권과 방콕아시안게임,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 1980년 케냐 대체올림픽까지 대한민국의 아마복싱 수장으로 복싱판을 쥐락펴락 했던 복싱계의 대부였다.

조철제는 특히 남북간의 경기에서는 분명한 철학을 품고 경기를 참관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LF 이석운이 북한의 김우길에게,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선 B 황철순·LW 박태식이 북한의 노영수와 구영조에게 3연패를 당한바 있다.

1977년 아시아선수권(자카르타)대회에선 LF급의 오인석과 B급의 황철순이 북한의 이병옥과 정조웅에 각각 판정승을 거뒀다.

이후 선수단에 대통령 축전이 날아오는 등 마치 종합우승을 차지한듯한 축제 무드 에 빠졌다. 분패한 북한팀은 남은 경기를 포기하고 철수를 하고 만다.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는 LF 홍진호와 F 오인석이 북한의 이병욱과 김영철에 연패한 상황에서 북한의 IOC 장웅 위원장이 링 위에서 승리의 세레모니 를 연출하고 내려오자, 득달같이 달려간 조철제는 그의 안면을 향해 일격을 날려 경기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조철제는 북한 선수의 편을 드는 등 한민족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적도 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B급 1회전. 북한의 구영조와 필리핀의 아로살과 대결에서 양 선수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당시 부심을 보던 한국인 심판 조석인씨가 난감한 표정으로 조철제를 바라보자 조철제는 북한팀에 승점을 주도록 시그널(Sigmal)보냈다.

결국 북한의 구영조가 3ㅡ2 로 승리를 거둬 결승에서 구영조는 황철순을 꺽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조석인 심판은 귀국 후 중앙정보부에서 호출이 왔다고 필자에게 회고할 정도로 남북관계가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던 그때 그 시절이었다.

1977년 3월 제3회 태국 킹스컵대회에서도 조철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1, 2회 대회에서 박태식·박찬희가 대회 최우수상을 받으며 2연패를 달성한 한국팀은 F급에 출전한 박찬희(동아대)가 태국의 파용 에게 우세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 3회 감점을 당하는 등 판정패를 당했다.

이같은 상황에 조철제는 대한체육회 김택수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설명을 한 후 선수단을 전격적으로 철수시켰다.

당시 B 황철순, H 우광식은 결승에 Fe 김광수, 임병진, LW 박태식, LM 박일천, LH 김원전 등이 준결승에 올라 대회 3연패가 유력했지만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조철제가 이끄는 한국대표팀은 1978년 3월 제4회 킹스컵에 출전해 LM 박일천, M 장영길, LH 김남희, H 우광식 등 4체급을 석권, 명불허전임을 입증했다. 킹스컵 3회 우승으로 태국 국왕컵을 선수단을 대표해 조철제가 받기도 했다.

이후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 대회에 출전한 대표팀은 B 황철순과 LM 박일천이 은메달을 획득·쾌거를 이룩하자 당시 호형호제하던 대한체육회장인 박종규씨가 사비 5천만원을 전지훈련비로 지원한다.

1차로 멕시코로 전지훈련을 떠난 조철제는 현지에서 당시 멕시코 배구 감독 박지국씨의 도움으로 현지 선수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경비를 절감했다.

그는 이후 LA와 화와이 에서 전지훈련 할때도 역시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각종 경비를 해결했고 귀국후 남은 5천만원을 고스란히 복싱협회에 반납했다. 조철제의 폭넓은 인맥과 인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81년 1월 당시 생방송으로 중계된 한일국가대항전에서 벌어진 일화도 인간 조철제의 진면목 을 알 수 있다.

김유현(LH)이 일본의 사토에게 통쾌하게 KO승했다. 김 선수의 상대는 엠뷸런스 에 실려갔다. 이때 사업가가 조철제 부회장에게 회식을 제의했지만 조회장은 지금 선수들이 체중조절을 한상태이니 귀국해서 연락을 드리겠다고 한 후 추후에 회식자리에서 천만원을 지원받았다.

조철제는 식대비 23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잔금을 김유현에게 전달했고, 김유현은 극구사양, 700만 원 남짓한 돈을 복싱협회 기금으로 입금 시켰다.

이에따라 1982년 5천 6백만원의 시드 머니가 탄생했고, 이 기금은 1997년 김승연 회장이 퇴임하면서 김운용 회장에게 인수인계할 때 16년동안 17억 6천만원 으로 불어났다.

이 비화는 당시 사무국장을 맡은 박형춘 전 한국체대 감독의 전언이다.

당시 1천만 원을 기탁한 사업가는 삼우트레이딩 대표 유병언이다. 역사·정치적 평가를 떠나 그가 복서 김치복 을 후원하는 등 복싱에 사랑과 관심을 보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그가 사망했을 때 조 부회장은 그의 장례식에 복싱인을 대표해 참석했다.

올해 86세인 조회장은 전국행사장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홍수환 KBC회장(사진 좌측)과 조철제 부회장. 조영섭 제공

영주 대한복싱협회 전용경기장 개관식에는 프로복싱을 대표한 홍수환 KBC 회장과 함께 아마복싱을 대표해서 참관했다.

그에 대해 대한복싱협회 기술위원인 이용선 심판은 "한국 아마복싱 백년사에 스승 같은 존귀한 분" 이라 갈파했다.

조철제 부회장과 이흥수 감독(사진 우측). 조영섭 제공

조 부회장은 '대표팀 감독은 검증된 지도자를 발탁해야 한다'고 말하며 김승미, 이흥수, 한정훈 등 3명의 지도자를 꼽았다.

'16피트 정방형의 링 위에서 육체와 육체가 부딪쳐 가야하는 권투경기에서는 파괴적인 성격이 요구되고 눈빛에서 살기가 넘쳐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살기가 사라진 복서는 사양길이라고 단언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정세균 국무총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원로주먹인 조창조 회장, 김원기 장관 등과 원로회 모임에서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고있다. 영어로 일지를 기록하는 조 부회장을 보면 101세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오버 랩 된다.

늙으면 예나 지금이나 퇴물 취급을 받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는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뭔가를 익히며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 애쓴다.

'나는 느리고 천천히 걸어가지만 절대로 뒤로 가지 않는다. 왜냐면 인생 이란 삶이 숫자가 아닌 숫자 속의 삶이기 때문' 이라는 링컨의 명언이 오버랩된다.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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