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N0W] 양궁명장 박성수, 지도자로 '세계대회·아시안게임' 恨 풀다(하)

험난한 관문 뚫고 태극 궁사 발탁돼 극적 역전 드라마 완성… 서울 올림픽 금
영광은 짧아…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은 나가지 못하고 2000년 은퇴
'영원한 스승' 서거원 감독의 배려와 가르침 힘입어 지도자로서 꽃길 걸어
남편과 아빠로서도 100점… 가족과 함께 볼링·등산 등 즐겨

▣ 어떻게 지내십니까 … 1988 서울 올림픽 영광의 얼굴들 ⑦
박성수 양궁 남자 단체전 금메달리스트 [하]


1988 서울 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에서, '태극 궁사 트리오' - 박성수, 이한섭, 전인수(왼쪽부터) - 가 과녁을 조준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발간 "1989 스포츠 사진 연감"

1988년 10월 1일 화랑양궁장, 양궁 남자 단체전 준결승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픈 라운드 관문을 통과한 12개국이 결승 전장(戰場)인 그랜드 파이널 진출 티켓 8장을 놓고 펼치는 각축전이었다.

한바탕 파란이 거세게 일었다. 최강으로 꼽히던 한국의 예상치 못한 부진에, 장내는 술렁였다. '6위(960점)!' 이변의 결말이었다.

오픈 라운드에서 거침없이 내달리며 1위(3,862점)에 올라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던 한국 아니었던가. 1위로 2차 관문을 뚫은 미국(992점)에 크게 뒤지는 어이없는 전락이었다.

비록 그랜드 파이널 티켓을 따내긴 했어도, 금메달 전선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졌다. 하루 전, 개인전에서 '고교생 궁사' 박성수가 겪은 역전 악몽이 재현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순간적으로 한국 팬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그날, 그는 다 잡았던 대어를 눈앞에서 놓쳤다. 승천하려던 용(금)은 순식간에 이무기(은)가 됐다. 신의 농락으로 빚어진 역전 드라마의 희생양이 되며, 주인공에서 조연으로 운명이 바뀌었다.

그러나 전인수-이한섭-박성수가 호흡을 이룬 '태극 궁사 트리오'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서로서로 격려하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당황하지 말자. 서로를 믿고 사선에 서자. 설령 내가 잘못 쏘더라도 다른 동료 2명이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며 편안하게 활시위를 당기자."

기우(杞憂)였다. 준결승전에서, 갑자기 페이스를 잃은 이한섭은 동료들의 다독임에 분발했다. 심기일전한 태극 트리오는 재역전 드라마를 썼다. 금 과녁을 꿰뚫었다. 미국을 여유 있게 제치고(986점:972점) 금메달을 쟁취했다.

한국 남자 양궁 사상 첫 올림픽 우승이었다. 등정 신화의 한가운데에 '소년 궁사' 박성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 어렵고 힘들었던 선발전과 담금질, 올림픽 금메달의 자양분 돼

2011 토리노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에서, 남자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은 박성수 감독(오른쪽)은 개인전과 단체전 석권 위업을 일궜다. 왼쪽부터 장영술 총감독, 오선택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당시), 김우진, 임동현, 오진혁. 박성수 제공

박성수 인천 계양구청 감독은 감개무량한 듯했다. 33년이란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지만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시상대 맨 위에 섰을 때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올림픽대표 선발 과정과 고달팠던 담금질이 순간적으로 스쳐 갔다."

무척이나 험난한 관문이었다. 안방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의 기세를 뽐낼 세 명의 궁사를 허투루 뽑을 수 없었던 데서 비롯된 난관이었다.

고교(진해 종합) 3년생, 아직 약관(弱冠: 20세)에도 이르지 못한 그는 올림픽대표 선발전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1~4차 선발전에서, 단독 선두를 질주했다.

갑자기 선발 방식이 바뀌었다. 더욱 정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대한양궁협회(KAA)는 컷오프(Cutoff) 방식의 선발전을 몇 차례 추가했다. 열 개 이상의 관문, 곧 '지옥의 선발전'을 돌파한 단 세 명만이 태극 궁사로 뽑혔다.

그랬기에 본 마당인 올림픽에서 안은 영광은 소년 궁사에게 무척이나 거센 감격의 물결로 다가왔다. 고대하던 금메달과 함께 은메달(개인전)까지 결실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2년 전에 맺혔던 아쉬움과 한을 씻어 낸 수확이기도 했다. 1986년, 그는 생애 첫 국가대표에 뽑혔다. 고교 1년생이 일으킨 선풍(旋風)이었다. 그 전해 국가대표 상비군 선발에 이은 거듭된 도약이었다.

그러나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선, 한국 양궁을 대표하지 못했다. 선발전에서 5위에
그쳐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태극 궁사 티켓은 네 장이었다.

그는 아시안 게임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4년 뒤, 1990 베이징(北京)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쓴잔을 들었다.

◇ 잊을 수 없는 인생의 멘토 서거원 감독은 '영원한 스승

지난해 11월 열린 한국실업양궁연맹 회장기 대회가 끝난 뒤, 인천 계양구청 선수단이 자리를 함께했다. 왼쪽부터 서거원 단장 겸 총감독, 박민범, 한우탁, 김종호, 조대진, 윤영준, 박성수 감독. 박성수 제공

박성수 감독은 올림픽에서 금자탑을 쌓으며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선수로서 영광의 시절은 짧았다. 올림픽 무대를 빼면 세계 선수권 대회나 아시안 게임 마당을 밟지 못했다. 태극 궁사로 발탁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그는 2000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2년 전 목 디스크가 발병해 제대로 선수 생활을 못 하던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초교(진해 중앙) 6학년 때 전국 소년 체육대회가 끝난 뒤 갑자기 닥친 입스(Yips) 때문에 일시적으로 내려놓은 적은 있었어도 줄곧 함께해 온 활을 떠나보냈다.

1980년, 초교 3학년 때 처음 활을 잡은 이래 20년 동안 불살랐던 열정이었다. 진해 동중학교(진해 남중학교에서 전학)→ 진해 종고→ 삼익악기(1994년 해체)→ 인천시체육회→ 인천 계양구청(1996년 4월 창단)을 거치며 한국 양궁사의 한쪽을 장식한 그였다.

지도자로 변신했으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불타올랐다. 서울 올림픽 담금질 때부터 줄곧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 준 '영원한 스승' 서거원 감독의 보살핌과 뒷받침이 컸다.

"잊을 수 없는 스승님이자 인생의 멘토(Mentor)시다. 고비가 닥칠 때마다 '좌절하지 말고 더 힘내 앞으로 나아가라.'고 격려하며 이끌어 주셨다. 그분이 없었더라면, 아마 양궁을 포기했을 것 같다."

스승은 진한 애정으로 제자의 앞길을 비췄다. 자신이 팀을 옮길 때마다 제자를 함께 데려갔다. 제자가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을 개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사령탑으로 있던 인천 계양구청 코치에 제자를 앉혔다. 2014년엔, 사령탑에서 내려가며 제자의 감독 승격을 구단에 적극 추천했다. 스승은 현재도 단장 겸 총감독으로 제자를 성원한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코치로서 여자 국가대표팀을 이끈 박성수 감독(왼쪽)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휩쓰는 개가를 올렸다. 오른쪽부터 오선택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 윤옥희, 윤미진, 이특영, 박성현. 박성수 제공

박 감독은 선수 시절 세계 선수권 대회와 아시안 게임에서 이루지 못해 맺힌 한을 지도자로서 풀었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선, 남자 국가대표팀 코치로서 ▲ 2005 마드리드 대회 개인전(정재헌)과 단체전(정재헌·박경모·최원종)을 석권했고 ▲ 역시 2011 토리노 대회 개인전(김우진)과 단체전(김우진·오진혁·임동현)을 모두 휩쓰는 개가를 올렸다.

아시안 게임에선, 2006 도하 대회 때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아 개인전(박성현)과 단체전(박성현·이특영·윤미진·윤옥희) 모두 정상으로 이끌었다.

◇ 가족과 함께하며 다정한 남편과 자상한 아빠로서 자리매김

박성수 감독(오른쪽)이 가족과 같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아내(앞줄 가운데)는 다정한 남편으로, 딸(왼쪽)과 아들(뒷줄 가운데)은 자상한 아빠로 박 감독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박성수 제공

박성수 감독은 선수와 소통을 통한 신뢰감 형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맥락에서, 솔선수범하려 애쓴다. 계양산 일대에서 실시하는 크로스 컨트리 훈련을, 또 1주일 3회(월·수·금요일)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같이 소화하는 배경엔, 이런 마음이 담겨 있다.

그의 좌우명인 '인화와 소통'은 가정생활에서도 그대로 배어 나온다. 그는 다정하고 자상한 가장이다. 부인(이승주 씨·44)-딸(고경 양·20)-아들(재영 군·18)로 이뤄진 가족과 될 수 있으면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힘쓴다. 주말 산행, 배드민턴, 볼링 등을 같이하며 혈육의 정을 새삼스레 느끼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거의 매일 집 근처의 청라 국제도시 호수공원을 한 바퀴씩 돌며 건강한 삶도 추구한다.

그는 안주에 젖어 나태한 습관이 몸에 밸까 경계한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인하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언론홍보학과)을 밟고 인천시양궁협회 전무이사로 활동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올해엔, KAA 이사에 선임돼 한결 더 바쁘게 됐다.

하루가 또 저물어 간다. 그는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고 반성한다. 그리고 내일 다시 떠오를 해를 기약한다. 밝은 앞날을 비춰 줄 태양이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인천 계양구청 양궁 팀이 대만 전지훈련 때 원단(1월 1일) 해돋이를 지켜보려 해변에 나갔다가 포즈를 취했다. 박성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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