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지내십니까 … 1988 서울 올림픽 영광의 얼굴들 ⑦
박성수 양궁 남자 단체전 금메달리스트 [상]
1988 서울 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에서, 한국은 금메달을 결실했다. 한국 남자 양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금 과녁을 명중시킨 '태극 궁사 트리오' - 전인수-박성수-이한섭(왼쪽부터) - 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발간 "1989 스포츠 사진 연감" '소년 궁사'는 못내 아쉬웠다. 화가 치밀다 못해 자신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자기 몸의 일부분처럼 소중히 여겼던 활을 내팽개쳤다.
'왜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뾰족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안타까움만 거세게 밀려왔다. 손안에 거의 움켜쥐었던 금메달이 눈앞에서 아른거릴 뿐이었다.
1988년 9월 30일 화랑양궁장, 그랜드 FITA(국제양궁연맹) 라운드 방식을 새로 선보인 서울 올림픽 양궁 남자 개인전 그랜드 파이널(결승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막바지로 접어들수록 금메달 각축전은 불꽃을 튀겼다.
거리별(30·50·70·90m) 9발씩 총 36발(360점 만점)의 활을 쏘는 그랜드 파이널에서, 그는 줄곧 앞서갔다. 마지막 90m 9발만을 남기고, 8명 중 선두는 그였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 최종 승자는 제이 바스(미국)였다. 그는 신이 쓴 역전 드라마의 희생양이 됐다. 336점:338점, 단 2점 차의 쓰라린 패배였다. 잡을 듯했던 금메달은 은메달로 화했다.
서거원 남자 대표팀 감독이 괴로워하는 그를 달랬다. 호흡을 이뤄 단체전을 치를 전인수·이한섭 선배도 위로했다. 모두가 한결같이 따듯이 격려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힘을 내 내일 치를 단체전에서 기필코 금메달을 따내 오늘의 아쉬움을 씻어 내자. 우리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등정이다."
하루 만에 이뤄진 설욕전이었다. 이튿날(10월 1일), 단체전의 주인공은 그를 비롯한 '태극 트리오 궁사'였다. 미국에 패배의 쓰라림을 되갚은 통쾌한 승리(986점:972점)였다.
양궁 종목 마지막 날 마지막 판에 올린 개가였다. 아울러 올림픽 양궁 사상 처음 도입된 단체전에서, 금 과녁을 꿰뚫고 품에 안은 영광이었다.
소년 궁사는 비로소 웃었다. 한국 남자 양궁 사상 첫 금 과녁을 명중시킨 그의 가슴속으로 환희와 감격의 물결이 밀려들어 왔다.
서울 올림픽 양궁의 대미를 장식한, 갓 애티에서 벗어난 '고교생 궁사' 박성수(18·진해 종합고등학교·당시)였다.
◇ 선수와 지도자로서 모두 올림픽 금과 연 맺어박성수 인천 계양구청 감독은 덕장답게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질 않아 인터뷰 내내 편안한 느낌을 줬다. 최규섭 기자 33년이 흘러갔다. 홍안의 소년은 어느덧 반백의 문턱을 넘어섰다. 지천명(知天命: 50세)을 넘어선 지도 이태가 지나간 박성수 인천 계양구청 양궁 감독이다.
그러나 '미소년 궁사'라는 애칭까지 얻었던 그 시절의 모습은 덧없는 세월의 흐름마저 뛰어넘은 듯했다. 시종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선, 소년의 순진함이 그대로 배어났다. 철든 이래 줄곧 승부 세계를 밟아 온 승부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원숙미가 엿보이는, 물씬 풍기는 덕장의 풍모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럴 만하다. 2001년 1월, 인천 계양구청 코치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이래 '인화'와 '소통'에 초점을 맞춘 가르침으로 빛나는 결실을 올린 데서도 엿볼 수 있는 덕장의 형적이다.
"뛰어난 선수가 빼어난 지도자가 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이 말은 적어도 그의 앞에선 무색해진다.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평천하를 이루며 '양궁 한국'의 성가를 드높였기 때문이다. 전장(戰場)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명장의 반열에 올라선 그다.
2012 런던 대회에서도 박성수 감독(왼쪽)은 '올림픽 금 인연'을 이어 갔다. 오진혁이 28년간 맺힌 남자 개인전 금의 한을 풀었다. 오진혁(오른쪽)이 금메달을 확정한 뒤, 남자 대표팀 코치를 맡았던 박 감독은 함께 태극기를 들고 세리머니를 펼쳤다. 박성수 제공
그는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나 올림픽 금메달과 인연이 깊다. 서울 올림픽 때 맺은 금메달 연(緣)은 2012 런던 올림픽까지 이어졌다.
지도자로 변신한 뒤 첫 올림픽 금 수확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이뤄졌다. 인천 계양구청에서 길러 낸 박경모가 임동현·장용호와 호흡을 맞춰 남자 단체전 금을 획득하며 시작됐다.
4년 뒤 2008 베이징(北京) 올림픽에서도 금 결실은 계속됐다. 이번에도 박경모였다. 박경모는 임동현·이창환과 짝을 이룬 금(단체전)은 물론 은(개인전)까지 쟁취했다.
또, 4년이 흘러 2012 런던 올림픽이 도래했다. 이번엔, 그가 직접 지휘했다. 남자 대표팀 코치로서였다.
역시 인연은 단절되지 않았다. 오진혁이 끈질긴 금 인연의 끈을 이어 갔다. 개인전에서 금 과녁에 적중시켰다. 한국 양궁 올림픽 사상 첫 개인전 금메달이었다. 1984 로스앤젤레스 대회 때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은 뒤 28년 만에 이룬 금자탑이었다.
한국은 단체전(오진혁·임동현·김법민)에서도 동메달을 차지했다.
2016 히우(리우) 올림픽에서, MBC 해설위원을 맡았던 박 감독(왼쪽)이 개인전과 단체전을 모두 석권한 구본찬(가운데)과 김완태 캐스터와 함께 기쁨을 나눴다. 박성수 제공 2016 히우 지(리우 데) 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그는 올림픽 금 과실을 따는 순간을 함께했다. 이번엔 MBC 해설위원으로서였다.
"남자 대표팀은 올림픽 경험이 없는 신예들(구본찬·이승윤·김우진)로 이뤄졌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패기가 넘친다. 위기가 닥치면, 오히려 과감하게 활시위를 당겨 10점을 쏘며 고비를 넘기곤 한다. 그처럼 굳센 정신력과 과단성을 앞세워 역대 올림픽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수확을 올리지 않을까 싶다."
막이 오르기 직전에, 그는 자신 있게 예상했다. 그리고 예측은 신들린 듯 들어맞았다. 개인전(구본찬)과 단체전 모두 정상을 휩쓸었다. 한국 남자 양궁 올림픽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 소통으로 쌓인 굳은 믿음, 대풍의 밑거름 돼선수들과 소통을 통한 신뢰 형성을 중시하는 박성수 감독은 제자들과 함께 종종 산에 오른다. 인천 계양구청 선수들과 같이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을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윤영준, 박민범, 박 감독, 한우탁, 조대진, 김종호. 박성수 제공 "양궁을 잊고 마음속에서 지었다."
뜬금없었다.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궁사로서도 빼어났고 지도자로서도 대가의 경지에 오른 명장한테서 나온 말이라니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 박성수 감독이 20여년 동안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체득한 소중한 지도 철학이었다.
"지도자 인생을 시작한 초창기엔, 답답할 때가 많았다. 선수가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화가 나 질타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자신의 선수 시절 모습을 깨끗이 잊어야 한다는 점을 터득할 수 있었다. 물론 활 쏘는 기술은 중요하다. 하지만 마음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수시로 '최고의 스승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고 제자들을 일깨우곤 한다."
수없는 시행착오에 힘입어(?) 각인된 지도 철학은 그가 으뜸으로 삼은 지도 덕목인 소통을 매개로 구현되고 있다.
"선수들과 신뢰 관계를 형성할 때 매끄럽게 팀을 운영할 수 있고 나아가 자연스레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오랜 시간과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어우러져야 한다. 선수들과 자주 어울려 게임 등을 통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려 노력했다. 다양한 대화의 창구가 열리면서, 상호간에 친밀감이 쌓이고 믿음도 생겼다."
그가 제자들과 함께 자주 산을 찾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인화에 바탕을 둔 소통은 정상으로 올라서는 데 튼실한 디딤돌이 됐다. 또한, 대풍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그는 큰 고비 없이 외길을 걸어왔다. 한국 양궁사에 깊고 굵직한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 '양궁 인생'이다.
박성수 인천 계양구청 감독(왼쪽)이 진지한 모습으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최규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