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HISTORY]1976년 붕괴 직전 복싱 재건한 염동균 챔프

아마전적 60전 53승… 홍수환 2전 2패와 대조
1976년 유제두, 홍수환 패배로 만신창이 된 복싱계에 챔프로 등극
은퇴 후 유명우, 박종팔, 백인철, 문성길, 황충재 등 경기주최 프로모터
동양·세계타이틀 통산 21차 방어의 대업 이룩한 레전드

프로복싱 루키대항전에서 복싱 부활을 다짐하는 김성권 화선회장과 염동균 챔프(사진 우측). 조영섭 제공

필자는 최근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 위치한 ㈜화선 야외 특설링을 찾았다. (사)한국 권투협회(KBA) 주관의 루키 대항전(4회전 8경기)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경기장에는 전 WBA 슈퍼미들급 백인철 챔프, 전 WBC 슈퍼 밴텀급 염동균 챔프 등이 참석해 매의 눈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염동균은 필자가 1994년 미리노 프로모션 사범으로 재직할시 직장상사여서 친근감이 더했다. 염동균 챔프는 1950년 11월10일 충북 옥천태생이다.

이곳에서 5살 때 대전으로 이사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63년 대전 한밭체육관(관장 이수남)에서 복싱을 수학했다. 그는 이듬해 보문중학교 1학년때 충남선수권 대회 39Kg(스몰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1967년 충남기계공고에 입학한 이후 호남선수권 결승에서 이거성(익산 남성고)에게, 전국선수권 결승에선 백종우(대구복싱)에게, 전국체전 결승에선 최재호(남산공전)에게 차례로 석패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충북대에서 특기생으로 스카웃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기량만은 인정받았다.

염동균은 6년간 60전 53승 7패(28KO승)를 기록 한 후 1970년 3월 7일 프로에 데뷔 한다.

동갑내기 친구이자 숙적인 홍수환이 아마 전적 2전 2패를 기록하고 염동균에 10개월 앞선 1969년 5월 10일 프로에 전향한 것과 대조(아마 전적에서)를 보인다.

1976년 11월 24일 로얄 고바야시와 타이틀전을 치루는 염동균(사진 좌측). 조영섭 제공

1971년 16전째 국내 챔피언에 등극한 염동균은 해당 타이틀의 14차례 방어에 성공했다. 이후 1974년 3월 17일 39전째 경기를 맞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밴텀급 동메달 장규철의 7차방어 상대로 낙점된 것. 그는 이 경기에서 동양 Jr 페더급 챔피언에 올라 5차 방어에 성공한다.

여담이지만 홍수환은 3개월 보름후인 그해 7월 4일 WBA 밴텀급 정상에 올라 염동균 보다 한발 앞선 행보를 보였다.

당시 염동균은 안면을 두텁게 수비하면서 강력한 양훅을 주무기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파이터로 통했다. 이런 그의 독특한 폼은 동양 페더급 챔피언 김현의 견고한 복싱폼을 벤치마킹해 변형시킨 결과물이었다.

1960년대를 풍미한 김현은 프로복싱사상 공식전적만 131전 75승(26KO승) 40패 16무를 기록한 백전노장이었다.

염동균은 18전째인 1971년 11월 12일 괌에서 죠 살로마에게 10회 판정패한 이후 4년 6개월 동안 국내 타이틀전과 동양 타이틀전을 무려 20차례 치러 방어에 성공했다. 이기간 35승(17KO승) 2무를 기록하며 최절정기의 기량을 발휘했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의리도 전해진다.

염동균은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삼호 아파트(34평)에 거주하면서 수경사 시절 친분을 유지한 선배 허버트강(본명 강춘식)이 생활고에 시달리자 선뜻 5차 원정방어전(다나까 후따로)에서 받은 파이트머니 200만원을 주기도 했다. 허버트강은 이 돈으로 미아리에 아파트를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76년 8월1일 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전에 도전한다. 그날은 레슬링의 양정모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염동균은 53전 46승 6무 1패(21KO승)을 기록하고 있었고 챔피언 파나마의 리야스코는 36전 23승(12KO승) 9패 4무를 기록한 복서였다.

염동균이 3회, 7회 리야스코를 비틀 거리게 하는 등 전라운드에 걸쳐 원사이드한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주심 로자딜라의 횡포에 의해 결국 정상정복에 발목이 잡힌다.

잡힐 듯 말 듯 다가 왔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타이틀은 결국 리야스코(파나마)를 KO로 잡고 정상에 오른 로얄 고바야시(일본)를 상대로 획득하게 된다.

1976년 11월24일 고바야시를 안방으로 불러들여 판정승을 거두면서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에 이어 제4대 챔피언에 등극한 것.

염동균이 험난한 과정을 딛고 정상에 올라 설수 있었던 원인은 염동균의 스폰서 역활을 담당했던 야쿠르트 회사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야쿠르트 윤쾌병 회장은 염동균이 경기를 할 때마다 200만원씩 훈련비를 지급했다. 또 매달 30만 원씩 월급을 지급해 염동균의 꺼져가는 불씨를 재점화 시켜줬다.

야쿠르트 회사도 홍보대사 염동균 덕분에 충남지역에서 하루 판매량이 100만병을 돌파하기도 했다. 유산균 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엄청난 매출고를 기록한 것이다.

염동균 챔프(사진 우측)과 필자인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조영섭 제공

1976년 한국 프로복싱계는 난파 직전에 이르렀다. 그해 2월 17일 일본 동경에서 벌어진 WBA Jr 미들급 타이틀 2차방어전에서 유제두는 와지마 고이치에게 허망하게 져서 벨트를 풀었고, 8월 1일에는 염동균이 WBC 슈퍼 밴텀급 챔피언 리아스코에게 억지판정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또 홍수환마저 10월 16일 WBA 밴텀급 챔피언 사모라와의 인천 대첩에서 분패했다.

이처럼 만신창이가 된 현실에서 염동균이 고바야시를 2ㅡ0 판정으로 잡고 극적으로 걷어 올린 타이틀이기 때문에 기쁨은 배가 되었다.

염동균은 1977년 루벤 올리바래스(멕시코)와 도전자 결정전에서 6회 ko승한 호세 세르반태스(콜롬비아)를 꺽고 1차방어성공했고 통산 20차방어 성공했다.

염동균은 그해 5월 21일 탄탄한 체력에다 폭팔적 펀치력, 내구력까지 겸비해 17연속 KO 퍼레이드를 펼친 푸에르 토리코의 고메즈와 원정 2차 방어전에서 첫회 다운을 빼앗었음에도 불구하고 12회 KO패로 타이틀을 상실했다.

푹신푹신한 메트를 깔아 풋웍 을 제대로 활용할수 없었던 것도 무더운 날씨와 함께 이날 패인의 한 축을 담당했다.

여담이지만 염동균은 1회 먼저 다운을 빼앗은 후 무리하게 라이트훅을 가격하다 그만 오른손 엄지가 부러졌다. 경기를 마치고 글러브를 벗을 때 손이 퉁퉁 부어 글러브가 잘 빠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당시 수령 한 3천 500만원의 파이트 머니 를 포함해 11년동안 1억 5천만 원 정도의 재산을 보유했던 염동균은 1980년 12월 19일 홍수환과 경기를 끝으로 66전54승(22KO승) 5패7무를 남기고 은퇴를 한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땅 1평이 13만원, 마포 18평 아파트가 150만 원을 하던 시절이었다.

염동균은 은퇴 후 유명우, 박종팔, 백인철, 문성길, 황충재 등 대형복서들의 경기를 주최하는 프로모터로 변신해 맹활약 했다.

2006년에는 IFBA 스토르급 챔피언 박지현을 비롯 IFBA 슈퍼 페더급과 페더급 두체급 챔피언 우지혜를 탄생시키며 프로모터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한국타이틀 동양타이틀 세계타이틀전에서 통산 21차방어의 대업을 이룩한 염동균 챔프의 변함없는 복싱 사랑을 기대해본다.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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