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N0W] '유도가문 황태자' 이경근, '세계 황제' 등극까지(상)

아버지 때 발원 3대째 이어진 '유도 가문'을 빛낸 주인공
'만년 준우승 한'을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제패하며 씻어 내
여자 국대 조련해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서 눈부신 전과 올린 명장
17년째 지휘하는 한국 마사회, 한국 유도 명가(名家)로 자리매김

▣ 어떻게 지내십니까… 1988 서울 올림픽 영광의 얼굴들 ⑥

이경근 유도 하프-라이트급(-65㎏) 금메달리스트 [상]


1988 서울 올림픽 유도 하프-라이트급(-65㎏)을 제패한 이경근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활짝 웃으며 기쁨과 감격을 만끽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발간 "1989 스포츠 사진 연감"

소년은 잊을 수가 없었다. 무척 어렸던 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봤던 광경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얀 도복을 입고 각축을 벌이던 유도 경기의 매력은 그의 머릿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유도 입문을 반대했다. 몰래 체육관에 입관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대구 대성중학교 2학년 때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우리네 속담처럼, 천부적 자질은 곧 발현됐다. 한 달 반 만에 지역(경상북도) 대회에 나가 준우승했다.

결승전 상대는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라이트급(-71㎏·이하 당시)에서 금메달을 움켜쥔 안병근(대구 중앙중)이었다.

유도가 소년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순간이었다. 12년 뒤, 빛나는 결실로 나타난 씨앗은 이렇게 뿌려졌다.

1988 서울 올림픽 유도 하프-라이트급(-65㎏) 금메달의 주인공은 그였다. 이제는 우리 나이 스물일곱 살의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하며 만개한 이경근이었다.

◇ '준우승 징크스' 씻어 내고 서울 올림픽 금 감격… '금빛 가도' 질주 중 부상으로 은퇴

서울 올림픽 유도 하프-라이트급(-65㎏) 결승전에서, 이경근(사진 오른쪽)이 야누시 파브워브스키(폴란드)에게 빗당겨치기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이경근 제공

아직 배고팠다. 더 많은 달콤한 우승의 맛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럴 만했다. 그동안 얼마나 '준우승 징크스'의 쓴맛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고교(대구 계성) 2년 때 국가대표 선발전을 비롯해 태극 마크를 달고 처음 나간 국제 대회(1980 범태평양)와 1985 서울 세계 선수권 대회 등 고비 때마다 발목을 잡혀 정상 문턱에서 쓰러졌던 이경근이었다.

그만큼 2위 징크스를 말끔히 씻어 내고 정상에서 포효하겠다는 열망이 솟구쳤다. "세계 하프-라이트급의 1인자는 나노라!"라고 한껏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비로소 메이저 대회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시금석이었던 1985 전미 오픈 대회에서 국제 무대 첫 정상에 오른 기세를 이어 간 '금빛 엎어치기'였다.

이경근 한국 마사회 유도 감독이 33년 전 1988 서울 올림픽 우승 당시를 되돌아보고 있다. 최규섭 기자

서울 올림픽 금 영광을 뒤로하고 훈련에 정진했다. 땀은 정직했다. 금빛 가도를 내달리며 잇달아 정상을 밟았다. 1988 전미 오픈 대회(라이트급·-71㎏)와 1989 오스트리아 오픈 대회(〃)에서, 더는 그의 적수가 없었다.

돌연 시련이 닥쳐 왔다. 신의 시험일까, 시기일까? 국가대표로서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중 오른쪽 무릎을 다쳤다. 재활하며 다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운동선수로서 한창때를 지나 서른 줄을 눈앞에 둔 그의 몸은 뜻 같지 않았다.

1990년, 은퇴를 선언했다. 마음가짐을 굳게 다지며 새로운 길 개척에 나섰다.

◇ 여자 국가대표팀 이끌고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서 '대풍가' 불러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이 끝난 뒤 모교(대구 중앙중학교)를 찾아가 스승을 뵙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 사진 오른쪽부터 이경근, 그를 전학시켜 오늘날의 주춧돌을 놓아 준 한상봉 감독, 안병근, 김재엽. 모두 중앙중 동문으로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들이다. 이경근 제공

이경근이 연출하고 주연으로 연기한 한 편의 연극 '가문의 황태자' 제2막이 올라갔다. 쌍용 코치로 변신해 지도자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2년 뒤인 1992년 10월, 이해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나고 새로 구성된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로 선임됐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겨냥하고 태극 낭자 담금질에 나선 그는 조련사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명장이 약졸을 키울 리 없다.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유도는 '대풍가'를 불렀다. 금 1·은 2·동 1개의 풍성한 수확이었다. 역대 올림픽 최다 메달 획득의 쾌거를 올렸다.

조민선(미들급·-66㎏)은 금메달을 움켜쥐었다. 현숙희(하프-라이트급·-52㎏)와 정선용(라이트급·-56㎏)은 은메달을 안았고, 정성숙(하프-미들급·-61㎏)은 동메달을 따냈다.

1997년, 갑작스레 '유도 명가' 쌍용 유도단이 해체됐다. 그는 졸지에 둥지를 잃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재충전에 들어갔다.

3년 가까이 유도계를 떠났던 그는 2000년 10월 되돌아왔다. 이번에도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였다. 새로 구성된 여자 대표팀을 이끌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또다시 개가를 올렸다. 금 2개(이은희·조수희), 은 3개(김영란·배은혜·최숙이), 동 2개(김화수·조수희)의 눈부신 결실이었다.

너무나 정력을 쏟았나 보다. 그는 또다시 재충전에 들어갔다. 휴면에 가까운 칩거였다.

"재정적으로, 선친(이석도 씨·2008년 작고)께서 많이 도와주셨다. 국립 국악원에 근무하던 아내(양선희 씨)가 가정은 걱정하지 말고 푹 쉬라고 위로했다. 몇 년씩 별다른 생각 없이 쉬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쌓을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2019년 한국 마사회 유도단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경근 감독(사진 왼쪽 네 번째), 김재범 코치 (왼쪽 옆), 이동석 트레이너(오른쪽 옆)와 선수들. 이경근 제공

2년 3개월이 흘렀다. 2005년 1월 잇달아 낭보가 날아들었다. 세 번째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에 선임된 데 이어 한국 마사회 유도단 지도자 공개 채용에서 수석 코치로 뽑혔다.

그해 9월, 그는 결단을 내렸다. 후학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해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마사회에 전념하려는 뜻도 있었다. 1994년 창단해 명가의 반열에 들어선 마사회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지고 싶었다.

'마사회 인생'이 태동한 순간이었다. 2008년 7월 감독으로 승격함으로써 마침내 마지막 한 점을 찍고 작품을 완성할 자리에 앉았다.

마사회와 연을 맺은 지 햇수로 17년이 흘렀다. 더불어 보낸 세월을 반영하듯, '이경근 = 마사회' 등식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와 마사회가 이룬 환상의 호흡은 현재 진행형이다.

◇ 3대째 유도 가문의 '황태자'… 아버지는 초창기 한국 유도 동량

아버지(이석도 씨)는 '유도 가문'의 발원이었다. 1958 도쿄(東京) 아시안 게임 무제한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유도 초창기를 대표했다. 이경근 감독은 그때 아버지가 받았던 금메달(작은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경근 제공

이경근 감독의 재능은 천부적이라 할 만하다. '유도 가문'의 빼어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에서 비롯된 '유도 줄기'는 아들을 거쳐 손자에까지 뻗어 나갔다.

3대째 이어진 유도 집안의 근간인 아버지, 이석도 씨는 초창기 한국 유도의 기둥이었다. 유도가 시범 종목으로 치러진 1958 도쿄(東京) 아시안 게임 무제한급에서 우승하며 한국 유도에 서광을 비췄던 인물이다.

유도 집안이 한 자리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이경근 감독을 새록새록 추억에 잠기게 하는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큰형(용근 씨), 아버지, 둘째 형(현근 씨), 본인, 셋째 형(동근 씨). 막냇동생(승근 씨)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이경근 제공

아버지와 어머니(김옥금 씨) 슬하 5형제는 모두 유도복을 입었다. 어머니의 반대가 있긴 했어도,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면 그 뜻을 받아들였다. 5형제 모두 유도에 입문했음은 물론이다. 넷째인 이 감독의 둘째 형(이현근 씨)은 청소년대표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감독의 아들(이재우 씨)도 유도의 마력(魔力)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체육대학교 재학 중 뜻밖에 다치지만 않았더라도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남겼을지 모른다.

그래도 유도를 잊을 수 없었다. 2019년 5월,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이경근 유도관'(경기도 용인시)을 개관하고 후학 양성에 들어갔다.

외형으로 나타난 모양새를 볼 때, 3대째 계승된 유도 재능은 이 감독에게서 가장 잘 발현됐다. '가위치기 달인'으로 불리며 능수능란한 기술 유도를 뽐냈던 그는 세계 일인자에 등극한 '가문의 황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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