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1월 18일은 한국 프로 복싱사의 기념비적인 날이다. 빼앗긴 타이틀을 '리턴매치'에서 처음으로 되찾아 온 날이기 때문이다.
'리턴매치'로 국내 복싱사에 한 획을 주인공은 '작은악마', 소나기펀치', '작은들소'란 별명으로 통하던 WBA jr 플라이급 챔피언 유명우.◇ 이오까에게 빼앗긴 챔피언밸트, 337일만에 되찾기까지… 상상초월 파이팅영원한 스승 김진길(사진 좌측) 관장과 유명우 챔프. 조영섭 객원기자 유 선수는 '리턴매치'가 열리기 11개월전 일본 오사카 원정 18차 방어전에서 타이틀을 상실했다.
1991년 12월17일 벌어진 운명의 이오까와의 18차 방어전은 17차방어전 캬즈콩 단푸차이(태국)와 경기가 끝난지 8개월만에 링에 올라 컨디션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원정경기인 18차 방어전에서는 바뀐 규정 때문에 경기당일 상오 10시에 계체량을 마치고 아침 식사 후 2시간밖에 잘 시간이 없었다.
유 선수는 원래 경기 전날 계체량을 마치고 충분한 휴식과 수면으로 체력을 끌어올려왔다. 그러나 이날은 바이오리듬이 깨졌고, 체력회복도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간 기유나 도모히로, 고미야마 가쓰미, 다이호 겐분, 도쿠시마 히사시 등의 일본 복서들과의 4차례 방어전 모두를 KO로 승리한 만큼 이오까에게 패배할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당시 '국내용 복서' 라고 유 선수를 폄훼하는 질타성 기사가 많았고, 유명우는 체중감량의 고통만큼이나 힘들어했다.
은퇴한 카오사이 갤럭시의 19차 방어기록을 깨고 20차 방어를 한 후 링을 떠나겠다는 꿈도 이날 이오까와의 경기로 물거품이 됐다.
이후 유명우는 재기를 선언한다. 7개월 후인 7월 2일 새벽 관악산을 향해 나서는 그의 두 눈엔 최후의 결전을 나서는 장수처럼 비장함이 실려있었다.
그리고 4개월 보름 후인 1992년 11월 18일 불꽃투혼을 발휘, 동일한 장소인 적지에서 이오까를 꺾고 타이틀을 재탈환한 것이다.
일본 생리학 권위자인 도카이 대학의 다나카 세이지 교수의 특수프로그램에 맞춰 트레이닝을 받으며 유 선수를 상대로 벨트를 획득했던 이오까는 유 선수의 근성과 실력에 고개를 숙였다.
이날 유 선수의 승리는 일본에서 벌어진 세계 타이틀 6연패 악몽에 종지부를 찍은 승전보(勝戰譜) 이기도 했다.
이오까와의 승리에는 유 선수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1992년 8월의 어느날로 기억된다. 필자가 소속된 88체육관(관장 김철호)에 당시 이오까에게 챔피언 벨트를 빼앗겨 사기가 꺾인 유 선수와 김진길 관장이 스파링을 위해 방문했다.
당시 유명우는 육안으로 봐도 60kg을 상회 할 정도로 몸이 불어 있었다. 필자는 경험상 이오까라는 보다 체중과의 싸움이 시급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유 선수는 한계체중에서 무려 13kg 이상 불어나 있었다.
폭주 기관차가 멈춘 후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 한다는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유명우는 이날 26전 전승의 세계랭커 진윤언과의 스파링에서 수영선수처럼 각(角) 없이 휘젖는 펀치로 일관했다.
방전된 체력을 보인 것은 물론,시종일관 무기력한 범전을 펼쳤다.
이 스파링만 봐서는 유 선수의 타이틀 재탈환은 힘들 것으로 관측됐다.
불과 몇 달전 유명우와 동갑내기인 88서울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김광선(화랑체육관)이 진윤언을 상대로 매섭게 타격전을 펼치던 장면이 오버랩 된 필자는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필자의 생각은 기우였다. 유 선수는 이오까와의 경기에서 상상을 초월한 파이팅을 발휘했다. 6년 9일간 보유한 타이틀을 337일 만에 되찾아 오는데 성공한 것이다.
◇ 시작은 미비 했으나 끝은 창대… 초라한 아마전적, 화려한 프로전적친구이자 맞수인 안래기(사진 우측)와 포즈를 취한 유명우 챔프. 조영섭 객원기자 유 선수(57)는 1964년 1월10일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서 태어났다.
유명우는 삼성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고, 한강 중학교에 입학한 1977년 대원체육관(관장 김진길)에서 복싱을 시작했다.
한강중 3년때인 1979년3월 첫 무대인 전국학생 신인대회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탈락했다.
그는 인천체고에 진학한 1980년 경기도 신인대회에서도 첫 경기는 가까스로 이겼지만 2회전에서 다시 판정패했다. 이어진 학생선수권에서 또 다시 1패를 기록하며 1승 3패의 초라한 아마전적을 기록한다.
당시 그를 지도·감독한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인 송호철 선생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명우는 키가 작은 파이터로 아마추어 경기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평범한 복서였다"고 회고했다.
프로에서의 유명우는 달랐다.
1982년 3월 프로에 전향한 유명우는 7월에 개최된 제2회 KBC 신인왕전에 출전해 우승과 함께 감투상을 차지했다.
이후 문연리, 김기창, 안래기, 임하식, 손오공, 정비원 등 국내 정상급 복서들과 라이벌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1983년 3월 5일 안래기 선수와의 일전(8회전)은 유 선수로서는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일전이었다.
유명우가 이긴 경기였으나 내용상 패했다는 평이었던 것.
유 선수는 안래기와 경기 후 복싱에 권태를 느껴 강릉행 열차에 몸을 싣고 싸구려 여인숙을 전전하며 방황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진학까지 포기하며 세운 목표를 버리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자책감과 지고는 못 견디는 근성은 유명우를 방황의 늪에서 건져 올렸다.
결국 유 선수는 같은해 12월 4일 임하식과 경기를 앞두고 9개월 만에 복귀한다.
복귀 후 첫 스파링 파트너는 바로 필자였다. 마법에 걸린 듯 그는 필자에게 소나기 펀치를 쏟아 부었고, 정신없이 난타당한 쓰라린 아픔은 지금까지도 가슴에 고스란히 묻혀있다.
큰 파괴력은 없었지만 폭포수 처럼 쏟아지는 연타는 지금 생각해도 '압권'이었다.
1985년 9월 17연승(3KO승)의 유명우는 21승(9KO승)1패의 손오공(본명 손정구)과 매우 중요한 WBA jr플라이급 도전자 결정전을 치룬다.
유 선수는 각도가 미비한 훅을 난사하던 손오공에게 완벽한 커버링과 보디웍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일방적인 경기를 이끈다.
손오공은 처참하게 7회 쓰러졌고, 유명우는 소중한 출전권을 획득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손오공의 원초적 스승이 유명우의 트레이닝을 담당했던 김윤구 당시 동아체육관 사범이었다는 사실이다.
초창기 노량진 동아체육관에 등록한 손오공이 김윤구 사범에게 복싱을 배웠고, 직장 문제로 손오공이 양평동 필승 체육관으로 이적, 결국 돌고 돌아 기막힌 인연으로 연결된 것이다.
유 선수는 김윤구 트레이너와 호흡을 맞추며 1985년 12월 8일 조이 올리버(미국)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뒀다. 프로복싱 13대 세계 챔피언의 탄생이었다.
전설의 서막을 알린 유명우는 이후 6년 9일간 17차 방어에 성공하면서 각종 기록을 쏟아냈다.
◇ 장정구의 모든 기록 갈아치워… 링지 선전 베스트 517차 방어전에서 태국의 단푸차이와 방어전을 치루는 유명우 챔프(사진 좌측). 조영섭 객원기자 유명우는 세계타이틀을 21차례 치렀다. 이중 20승 1패(10 KO승)을 기록했다.
통산 18차 방어에 성공했는데 36연승과 함께 세계타이틀 매치 최다승(20승), 최다 연승(18회), 최다KO승(10회), 최다방어(18회) 등 장정구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물론, 복싱이 기록 경기는 아니지만 그가 수립한 알토란같은 기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유 선수는 17차 방어를 거듭 하는동안 역대급 강자와의 대결이 많았다.
1차와 8차방어 상대인 19전18승(15KO승)무를 기록한 호세 데 헤수스(푸에르 토리코), 3차와 12차방어전 때 맞대결을 펼친 32전 25승(9KO승) 4무 3패의 알젠틴 의 마리오 데마르코, 15차, 16차 방어전에서 맞붙었던 20전 전승(14KO승)의 4체급 석권자 레오 가메즈(베네주엘라) 등이 그들이다.
유명우는 이들과의 대결에서 예외없이 특유의 소나기 펀치를 내뿜으며 챔프의 사이클링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유 선수는 세계 최고 복싱전문지 미국의 '링지'가 선정한 '베스트5'에 들기도 했다.
당시 '링지'는 세계 3대 복싱 기구(WBA·WBC·IBF)의 현역 44명의 챔피언 중 체급과 관계없이 실력과 인기도면에서 Best 5를 선정했다.
유명우 외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차베스. 휘테커, 테일러, 홀리필드 등의 레전드 복서들속에 유 선수가 포함됐던 것.
유 선수는 39전을 싸우는동안 단 한번의 계체량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이는 철저하고 엄격한 자기관리를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차례의 다운을 당한적이 없는 것도 성실한 훈련이 뒷받침한 결과였다. 이처럼 체력은 간과할 수 없는 유명우만의 강력한 무기였다.
유 선수가 대단한 복서로 인정받는 이유는 또 있다. 타이틀을 보유하고 정상에서 스스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챔피언 입장에서는 링에 마지막으로 오르기만 해도 막대한 금액을 벌 수 있다. 이 때문에 세계복싱사를 빛냈던 숱한 복서들이 명예롭게 은퇴하지 못하고 노추를 보이고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유명우는 돈 보다 명예를 선택하며 링을 떠났다.
◇ 한국 배출 챔피언 중 가장 성실하고 장수93년 2월 문성길 8차 방어전을 참관한 필자와 유명우 챔프(사진 우측). 조영섭 객원기자 유 선수는 짐념의 복서다.
호세 데 헤수스, 마리오 데마르코, 레오 가메즈 등 1차전에서 고전을 했지만 그들과 벌인 2차전에서 군말없는 판정으로 제압했던 것이 그의 집념을 말해준다.
역시 1차전에서 석패했던 이오까를 2차전에서 보란 듯 판정으로 잡고 한국복싱의 대들보로 자존심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명우는 한국이 배출한 챔피언 중 가장 성실하고 가장 장수한 챔피언 이었다.
48.980kg을 무려 7년동안 유지하며 21차례의 세계타이틀전 을 치룬 결과가 이를 대변 해준다.
1993년 9월3일 타이틀을 반납하고 17년 복싱 인생에 마침표를 찍은 유명우는 2012년 한국 권투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다.
이듬해 2013년 미국 뉴욕에서 거행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현재는 프로모터로 변신, 후배들을 위해 활동(버팔로 프로모션 대표)중이다.
한국이 배출한 43명의 챔피언 중 가장 평판이 좋은 챔피언 중 한명인 유명우의 건승을 빈다.
조명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