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싱사상 최초로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장정구와 마이크 타이슨. 조영섭 객원기자 복서 장정구, '짱구'란 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국내 복서 중 이력(履歷)은 역대급이다.
굵직한 이력만 나열해도 화려하다. 프로복싱 제12대 세계챔피언이다. 한국복서중 최초로 15차방어에 성공했다. 국내 첫 명예의 전당(IBHOF)에 헌액된 복서다.
세계적 복싱 사이트인 복스렉(boxrec.com)에 라이트 플라이급 올타임 세계1위에 기록됐다.
이쯤하면 국내에서 탄생한 43명의 세계챔피언 중 국보급 챔피언임에 틀림없다. ◇ 아마때부터 월등한 기량… 87% 승률장정구 챔프가 처음 인연을 맺었던 이영래 트레이너(사진 아래). 조영섭 객원기자 장정구는 1962년 2월 부산 아미동에서 태어났다. 1975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7월 태성체육관 이영래 사범에게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얼마안돼 전국체전에 2차례 선발되며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당시 장 선수가 활약한 부산 경남 지역에는 기량이 출중한 복서들이 유난히 많았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국가대표 장흥민(한국체대)을 위시해 홍동식(부산체고), 김상찬(가야고), 김재홍(동아고), 김평국(경상대), 안현문(동아대), 최연갑(부산광무) 등이 대표적이다.
장정구는 이들과 파이팅을 주고 받았다. 4년 동안 이들과의 대전을 포함, 아마추어 전적 42승(19KO·RSC) 6패 성적표를 남겼다. 87.5%의 승률을 보인셈이다.
장정구 못지않게 시대를 풍미한 유명우(인천체고) 챔프가 1승 3패의 초라한 아마 전적을 뒤로하고 프로로 전향(1982년 3월 28일)한 것과는 대조를 보인다.
◇ 의리의 사나이… 호불호 분명WBC L.플라이급 챔피언 4차 방어전에서 도카시키에게 9회 KO승을 거두는 장정구 챔프(사진 가운데 위). 조영섭 객원기자 장정구는 1980년 11월 프로에 데뷔했다. 당시 우수복서 등용문으로 통하던 MBC신인왕전을 통해서다. 신인왕전은 그의 독무대였다.
6전 전승(2KO승)으로 우승과 함께 우수신인왕에 선정됐다. 장정구의 화려한 프로권투사의 서막이었으나, 경제적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신인왕전 6번의 경기 파이트머니와 함께 부상으로 30만원이 지급 됐으나 그가 사범에게 받은 돈은 16%에 불과한 5만원이 고작이었다.
신인왕전 이후 18연승을 기록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던 장정구는 1982년 9월 사파타와의 첫 타이틀전에서 고배를 마신다.
그러나 이 패배는 훗날 장정구를 한층더 성숙시키는 기폭제 역활을 한다.
6개월 만에 사파타와 재대결한 장정구는 3회 KO로 승리해 정상(WBC LF급)에 올랐다. 정교하고 치밀한 전략의 승리였다.
여담을 하자면, 이 대결을 적극 추진한 심영자 후원회장이 훗날 곤궁한 처지에 놓이자 장정구는 심 회장의 칠순 잔치는 물론 77세 희수 잔치까지 직접 주선하는 등 은혜를 의리로 보답했다.
장정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심 회장 의 남편 친구인 롯데 신준호 회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심 회장에게 3천만원을 지원받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의리의 장정구는 반대로 부정적 생각이 드는 일에는 단호했다. 호불호가 분명했다.
1984년 3월 태국의 치탈라타 와 3차방어전을 앞두고 장정구는 극심한 체중고에 시달렸다.
극심한 체중감량에 어지러움을 느껴 잠시 휴식을 취할 때 A사범이 지인들과 옆방에서 화투를 치면서 다방 아가씨들과 소란한 분위기를 만들자 그는 A사범과의 결별을 결심한다.
3차 방어전을 마치고 최동철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KBS 스포츠뉴스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던 중 돌연 "저는 오늘 이 순간부터 A사범과 결별합니다" 라고 작심발언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 5년 3개월, 15차 방어 대업 달성필리핀 전지훈련 때 임현호 트레이너(사진 좌측)과 장정구 챔프. 조영섭 객원기자 필자와 장정구의 첫 인연은 1983년, 40여년 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필자는 88프로모션(회장 심영자)에 입단한 상황이었다. 프로권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체육관 전용 승합차를 타고 문화체육관 입구에 도착했을 무렵, 안에서 밖에 있던 장정구를 대면했다.
순간 누군가가 "야 짱구다" 라고 소리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합차 문을 연 장정구는 "어느 놈이 짱구라 했냐"고 다그쳤다.
장정구만의 카리스마 때문이었을까. 당시 승합차내 우리 일행은 얼어붙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승합차 안에는 필자를 비롯 박광구 김의진 박용운 최연갑 황동룡 등 88 프로모션 창단 멤버들이 타고 있었으며, 범인은 훗날 WBA, WBC 플라이급 양대기구 챔피언에 올랐던 김용강이었다.
장정구는 4차방어전부터 임현호 트레이너로 교체하고 롱런가도에 시동을 건다.
서대문 '사자'로 통했던 임현호 사범은 장정구가 베스트 컨디션에서 링에 설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인 트레이너였다.
당시 상대인 도카시키는 체중조절에 고전한 장정구에게 밀물처럼 대쉬를 하며 파상공격을 펼쳤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서 장정구의 진가가 또 다시 드러났다.
체력이 소진된 그는 유효 적절하게 사우스포 자세로 스위칭을 하면서 전술에 변화를 줬다. 그러자 호랑이처럼 사납게 돌진하며 타격전을 벌이던 도카시키는 순간 고양이로 전락했다.
도카시키는 '오소독스'에서 '사우스포'로 바꾼 장정구의 타점을 전혀 맞출 수 없어 난타를 당했고, 결국 9회 TKO패를 당했다.
도카시키는 경기 후 "장정구는 귀감이 될만한 위대한 챔피언" 이라고 말했다. 또 "승부처에서 유효적절하게 구사하는 그의 스위칭에 혼선이 와 경기를 풀지 못했다. 7회 이후 체력이 소진된 장정구에 가미카제식으로 육탄공격을 펼쳤지만 챔피언의 경기운영과 지략이 한수위 라 참패를 당했다"고 회고한바 있다.
장정구는 8차방어전이 벌어질 즈음 서초동 자택에 도둑이 들어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수면제에 의지 했으나 슬기롭게 극복하고 5년 3개월 동안 15차 방어의 대업을 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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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사 때문에 챔프 밸트 잃어… 복싱사 일익 기대장정구 세계 타이틀 획득 32주년 기념식을 주최했던 조영섭관장(사진 왼쪽)과 장정구 챔프. 조영섭 객원기자 한국복싱은 최초의 세계챔피언 김기수를 필두로 4전5기의 홍수환, 소나기 펀치의 유명우, 돌주먹 문성길, 백인철, 박종팔, 멕시칸 킬러 박찬희, 독일병정 김태식 등 기라성 같은 복서들이 즐비했다. 장정구는 이들 중 단연 거성(巨星)으로 평가되고 있다.
장정구의 권투 스타일은 김태식 전 챔피언과 비교하면 쉽게 설명이 된다.
김태식은 상대의 펀치를 꼿꼿이 선체 맞은데 반해 장정구는 헤드웍과 보디웍을 하면서 흘려 맞는 스타일이었다. 완충작용 때문에 데미지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스타일을 구사했던 것.
특히 상대에 따라 변화무쌍한 전략과 전술을 펴나가는 능력에 있어서는 장정구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복서 장정구. 그는 통산 42전 중 20차례가 세계타이틀 매치였다.
그중 세계챔피언을 지낸 복서들과 모두 17차례 경기를 치러 13승 4패의 기록을 남겼다. 챔피언들의 챔피언이었던 셈이다.
순도면에서 타 복서들을 앞도하는 커리어를 보유한 그는 1993년도에 WBC 창립 30주년 최우수복서 27인에 선정됐다.
이에 앞서 1985, 1986, 1987년 3년연속 최우수복서에 선정됐다. 이뿐 아니라 태국의 카오사이 갤럭시, 일본의 파이팅 하라다에 이어 국내 최초, 아시아 3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영원할듯 했던 장정구의 챔피언 밸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수가 발생해 잃고만다.
가정사 때문으로, 필자는 사정을 잘 알고 있지만 불운한 개인사 이기에 더 이상 언급을 하지는 않겠다.
가정사로 인해 피땀 흘려 번돈을 한순간에 날린 장정구는 만신창이가 됐고 더이상 링에 설 수 없었다.
필리핀 체육회 박치순 고문(사진 우측)과 포즈를 취한 장정구 전 세계복싱 챔피언. 조영섭 객원기자 최근 장정구는 조력자인 박치순 전 필리핀 한인회장의 도움을 받아 여러가지 일을 기획, 실행하고 있다.
이순에 접어든 장정구 챔프가 한국복싱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때가 왔다. 늘 그랬듯, 여전히 응원한다. 필자에게 장정구는 영원한 '챔프'이기 때문이다.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