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지내십니까 … 1988 서울 올림픽 영광의 얼굴들 ④
한명우 레슬링 자유형 82㎏급 금메달리스트 [하]
1988 서울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82㎏급에서, 한명우의 '붕대 투혼'은 감동을 자아냈다. 눈 위를 감싼 붕대에 피가 배어 나오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일간스포츠 발간 "1989 스포츠 사진 연감"소년의 꿈은 복서였다. 박진감 넘치는 듯했던 복싱은 어린 그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자신도 사각의 링에서 한껏 투혼을 불사르고 싶었다.
다니던 학교(당진상업고등학교·현 당진정보고)를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다. 1974년 남산공업전수학교(현 리라컴퓨터고)에 신입생으로 들어갔다. 복싱부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였다.
친구들보다 2년이나 늦은 입학이었지만, 꿈에 부풀었다. 그토록 그리던 복싱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됐다는 마음에,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런데 신이 정한 한명우의 운명은 레슬링이었다. 친구 따라 우연히 도전했던,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현 대한레슬링협회·KWF)가 시행한 신인 발굴 프로젝트는 그의 인생 항로를 바꿔 놓았다.
숙명 같은 레슬링의 길에 들어서야 했다. 신이 맺어 준 연(緣)이었다. 그만큼 끊을 수 없었다. 인연은 일도양단(一刀兩斷)의 대상이 아니었다.
◇ 불사른 열정, 한국 레슬링의 화려한 발자취로 나타나
KBS 레슬링 해설위원으로서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 등 주요 국제 무대에서 입심을 자랑했다(사진 왼쪽). 한명우 제공"레슬링을 그만두겠다." 8년 뒤에 터져 나왔던, 분노에 가득 찬 그의 일갈이다.
이해 6월 열린 1982 애드먼턴 세계 선수권 대회(8월·자유형)와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11월)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 웰터급에서, 그는 고진원을 꺾고 태극 마크를 다는 듯했다.
무슨 일이었을까? KWF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자체 평가전을 3회 실시했다. 그는 두 번 이기고 한 번 졌다.
KWF가 내린 결론은 '고진원 발탁'이었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한명우 부상'이었다.
한명우는 납득도 수용도 할 수 없었다. 떼어 놓은 당상이었던 국가대표 티켓을 바꿔치기 당했다는 분노에, 레슬링계를 떠났다.
그가 택한 새 길은 복싱이었다.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치며 마음속 깊숙이 쌓인 화와 울분을 풀었다.
그러나 운명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4개월 뒤 경상남도 일원에서 열린 제63회 전국 체육대회에서, 그의 모습은 레슬링 매트 위에서 띄었다. 고향(당진군·당시)을 위해 뛰어 달라는 충청남도체육회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승은 한명우의 몫이었다.
그는 레슬링계로 되돌아왔다. 짧은 기간의 '외도'였다. 입문 3년 만에 국가대표 1진에 발탁될 만큼 빼어난 레슬링 자질을 신은 썩힐 수 없었다.
이때가 타의에 의해 눈길을 돌린 시기라면, 1990년대 초·중반(1992~1997년) 말레이시아로 나가 있던 시절은 자의에 따른 이별이었다.
한국 레슬링계를 떠났던 그의 복귀는 필연적 수순이었다. 그와 KWF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호보완적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한명우는 귀국 후 행정가로 변신했다. 훈련 이사(1년)→ 전무 이사(7년)→ 부회장(5년) 등 KWF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한국 레슬링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올림픽을 수놓은 화려한 발자취에서, 그의 열정이 배어남은 당연하다.
한국 올림픽사에서, 레슬링은 '효자 종목'으로 손꼽힌다. 광복 후 첫 금(1976 몬트리올·자유형 62㎏급 양정모)도 레슬링 몫이었다.
이후 1984 로스앤젤레스(자유형 68㎏급 유인탁, 그레코로만형 62㎏급 김원기)부터 1988 서울(자유형 82㎏급 한명우, 그레코로만형 74㎏급 김영남)→ 1992 바르셀로나(자유형 74㎏급 박장순, 그레코로만형 57㎏급 안한봉)→ 1996 애틀랜타(그레코로만형 48㎏급 심권호)→ 2000 시드니(그레코로만형 54㎏급 심권호)→ 2004 아테네(그레코로만형 60㎏급 정지현)까지 올림피아드에서 금맥이 단절되지 않았던 한국 레슬링이었다.
끊어졌던 금맥은 2012 런던 대회(그레코로만형 66㎏급 김현우)에서 이어졌다.
◇ 레슬링 울타리 넘어 다방면에서 존재감 뽐내
지난 4월 초 낙동정맥 사룡산 야간 산행을 마치고 동호회원들과 함께했다(사진 왼쪽 위). 한명우 제공한명우는 또 하나 남다른 재능으로 한국 레슬링 성장에 이바지해 왔다. 방송 해설위원이다. 2007년 말 KBS 레슬링 해설위원으로 위촉돼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부터 지금까지 마이크를 잡고 있다. 그동안 해설을 맡았던 주요 국제 무대만 하더라도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 각 세 차례씩이다.
"재미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그의 해설에 대한 평가가 어떠한지를 묻자, 그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말 그대로, 경륜에서 우러나온. 경기의 맥을 짚는 분석과 입심이 어우러진 그의 해설은 시청자를 사로잡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한명우는 사업가로서도 자질이 엿보인다. 키르기스스탄을 필두로 중앙아시아 쪽에 쌓은 탄탄한 인맥을 바탕으로 해외 컨설팅 분야에서, 뛰어난 수완을 보이고 있다. 대림종합개발 고문은 그의 또 다른 명함이다.
그가 무엇보다도 애착을 갖는 직함이 있다. 산악인이다. 그는 두 개의 산악 동호회(오지산행·자유인)에 적을 두고 한 주씩 번갈아 가며 등산을 즐긴다.
20년에 이르는 등산 경력만큼이나 그의 발길은 한국의 산에 두루 미쳐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 가운데 갈 수 있는 남쪽은 모두 섭렵했다. 요즘은 태백산맥의 구봉산에서 뻗어 부산광역시 다대포 몰운대에 이르는 낙동정맥(洛東正脈)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레골회(레슬링 골프 동호회)는 일본 레슬링인 동호회와 매년 한 차례씩 정기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2017년 일본 이바라키(茨城)에서 열린 제11회 교류전이 끝나고 양국 레슬링인들이 같이했다. 한명우 제공한명우에겐, 골프도 건강한 삶을 즐기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생활체육이다. 핸디 싱글의 상당한 수준에서도 그의 운동신경과 자질을 엿볼 수 있다.
"친목 도모와 건강 증진을 위해 만든 레골회(레슬링 골프 동호회)는 '건강 파수꾼'이다."
그가 창설해 회장을 맡고 있는 레골회의 기능은 이뿐 아니다. 일본 레슬링 동호회와 매년 정기적으로 교류하며 양국 레슬링계의 관계 증진에도 한몫한다. 2007년 처음 만난 이래 2019년까지 열세 번 모임(지난해엔 코로나 19로 중단)을 가졌을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악기 연주도 빼놓을 수 없는 취미다. 색소폰 연주 솜씨도 상당하다. 색소폰 동호회에 몸담고 수시로 봉사 활동을 통해 이 사회의 그늘에서 사는 사람들과 소통한다.
우리 나이 예순여섯, 그는 더는 '레슬링인 한명우'에 국한된 삶을 살지 않는다. 한 분야의 울타리에 그를 가두기엔, 그의 활동 폭이 무척 넓게만 느껴진다. 아울러 다방면에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그의 삶에선, 넘쳐 나는 건강미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