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년 4월 리노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문성길(사진 우측). 조영섭 제공지난 주말 필자는 대구복싱협회 임원들의 초청을 받고 문성길 전 챔프와 함께 대구광역시 남구청을 방문했다.
현장에 도착한 필자는 준비해간 문챔프 싸인이 담긴 글러브 14컬레를 조재구 남구청장을 비롯한 대구복싱협회 임직원들에게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조 구청장은 "문챔프가 복서로 성장기 시절을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오늘날 복싱계의 거목이 되었다"며 "시련과 아픔을 딛고 한층 성숙해진 모습으로 링 위에서 짙은 향기를 품어낸 문 챔프의 역경 극복기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이정표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프로복싱에서 두체급을 석권한 문성길 챔피언의 경기장면. 조영섭 제공조 구청장과의 만남을 서술한 것은 복싱을 포함한 엘리트 체육 부활의 초석은 정치인과 재벌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필자의 생각을 담기 위해서다.
1966년 6월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의 주도로 태릉 선수촌이 설립되었고, 최초의 세계챔피언 김기수 탄생과 최초의 국립대학인 한국체육대학 설립 등도 박정희 정권과 맞물려 있다.
국군체육부대 청무관 역시 복서 구상모와 친분이 두터운 포철 박태준 회장의 지원으로 건립됐다.
문성길 챔프 역시 1984년 LA 올림픽 8강에서 도미니카 선수에게 불의의 눈 부상으로 첫회 RSC로 패했을 때 한화 김승연 회장의 격려가 없었다면 최초의 세계선수권자 문성길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다.
김 회장은 문성길의 손에 700만 원의 격려금과 30만 원의 연금, 그리고 여동생과 친형을 한화 그룹에 취직을 시켜 주면서 복싱에 전력투구할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덕분에 심기일전한 문성길은 월드컵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릴수 있었다.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 문성길 체육관에서 조영섭 관장과 운동중인 문성길. 조영섭 제공문성길은 1979년 목포 덕인고에 입학, 첫 출전한 6월의 제30회 학생선수권대회 준결승 (플라이급)에서 경북의 정창구(경주상고)와 맞대결, 독일 탱크처럼 밀어 부쳤지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정창구의 빠른 발을 잡지 못하고 판정패했다.
이후 밴텀급에서 김상수(대구공고), 김창렬(순천 금당고), 김용호( 조대부고), 이방헌(한영고), 최주영(남성고).등에게 연패를 당하며 전국대회 7차례 출전 동메달만 6개를 획득한 불운의 아이콘 이었다.
반면 정창구는 1979년 제11회 전국 신인대회 결승에서 경북체고 정희조를 잡고 최우수복서로 선정된후 김성길, 이성희(이상 한국체대), 김상수(동아대)를 차례로 제압하며 문성길과 천양지차의 실력 차를 보인 테크니션 였지만 이후 정체 현상을 보여 훗날 문성길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졸업을 앞둔 1981년 어느날 문성길은 체육관에서 권현규(목포대)와 스파링을 펼쳤는데 권현규의 연타에 문성길은 마치 펀치볼처럼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유혈이 낭자한 상태로 끝이난다.
권현규는 극강의 황철순(한국화약)과 맞대결 초접전을 벌였던 복서였고 1982년, 1986년 아시안게임 금·은메달을 획득한 복서였다.
그날 저녁 유달산 기슭에 있는 자취방에서 문성길은 피 범벅된 속옷을 빨면서 추수릴 수 없는 슬픔이 덮쳐 절망의 눈물을 쏟아낸다.
그날 이후로 권현규는 문성길에게 둔한 신경 때문에 두들겨 맞으면서 답답하게 복싱을 한다고 해서 '갑갑이' 라고 불렀다.
하지만 문성길은 전신이 삶의 상처로 피고름이 흘러내려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로 무장 1982년 목포대학에 진학 후 매일같이 유달산 정상을 오르락 하면서 체력을 길렀다.
왠만한 강철 체력을 지닌 복서들도 7부 능선에선 속칭 퍼지고 말았지만 문성길은 '갑갑이' 라는 별명을 지우려 눈물을 삼키며 고난의 행군을 거듭하면서 완전체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천부적으로 체력과 펀치력등 하드웨어는 발군이었지만 스피드, 유연성, 테크닉 등 소프트웨어의 결여로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괴리감이 장벽처럼 높았지만 밤마다 아령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복싱의 기본인 레프트잽 을 쉼 없이 갈고 닦으면서 매진했다.
그 결과 어느 순간 공수의 연결고리가 톱니바퀴처럼 움직이게 만들어진다.
그러던 1982년 어느날 권현규와 기다리던 복수혈전을 벌여 이번엔 역으로 흠씬 두들기면서 더이상 '갑갑이' 가 아님을 증명한다. '갑갑이'가 아닌 '돌주먹'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스파링이 끝나고 '갑갑이'에게 일격을 당해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권현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것은 끝없는 노력은 끝없는 가능성을 창출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문성길이 실증해 보인 것이라 할수 있겠다.
해당 스파링은 문성길 복싱 역사에 변곡점이 되었다, 닭장 속에 갇혀있던 그가 드디어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와 독수리로 변신, 창공을 향해 도약을 시작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아마복싱 세게선수권자인 문성길의 현역시절. 조영섭 제공문성길의 첫 희생자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3차 선발전 결승에서 맞붙은 81년 뉴욕 월드컵대회 은메달 장임석 (조선대)이었다. 이때 문성길의 승리를 예상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첫 회부터 파상공격을 시작한 문성길은 천하의 장임석을 군말 없이 3회 RSC로 잡으며 대이변을 연출한다.
이후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태국의 완차이 퐁수리를 맞이하여 3회 KO승을 거두며 국제무대에 신고식을 올린다.
귀국해 청와대에서 전두환 전(前) 대통령과의 만남 자리에서 전 전 대통령은 문성길 차례가 되자 "아니 이게 누구야" 라며 문성길의 손을 꼭 잡았다.
문성길은 더 이상 '갑갑이'가 아닌 주목을 받는 간판 복서로 변모해 있었다.
빈농의 아들인 문성길은 금메달을 획득해 전 전 대통령에게 받은 격려금 3백만 원을 비롯해 1천 만원이 넘는 돈을 수령해 당시 집안의 부채 7백만 원을 탕감하고 나머지 돈으로 황소 2마리를 사 부모님께 사드리고 상경한 효자였다.
이후 1983년 로마 월드컵, 1984년 LA 올림픽, 1985년 서울 월드컵, 1986년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아시안게임 2연패와 더불어 월드컵과 세계선수권을 재패 하며 국위를 선양했다.

1993년 11월 12일 포항에서 타이틀 마지막 10차 방어전을 앞두고 조영섭 관장과 함께한 문성길. 조영섭 제공문성길은 라이벌 허영모와의 3연전을 통해 시너지효과를 창출 전력을 끌어올리며 이름 석자가 한층 더 빛을 발한다.
특히 1985년 벌어진 2차전에서는 아마 복싱사상 초유의 암표상까지 등장할 정도로 최고의 빅카드 였다.
당시 일반석은 1천500백 원, 특석은 3천 원이었지만 오전 10시에 예매를 시작하자 1700장이 삽시간에 매진되는 진풍경이 일어날 정도로 복싱 열기는 뜨거웠다.
허영모에 3연승을 거뒀지만 그를 지나치게 의식한 문성길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1986년 겨울 짐을 정리해 퇴촌한다.
그리고 사전 예약한 88 프로 모션 심영자 회장을 경남호텔에서 만나 계약금 7천만 원에 프로행을 선언했다. 복싱 2막이 펼쳐진 것이다.
1987년 3월 프로에 대뷔, 1988년 8월 단 7전 만에 WBA 밴텀급을 차지했다. 이후1990년 1월 WBC 슈퍼 플라이급 타이틀 마져 획득했다.
두 체급을 석권해 통산 11차 방어에 성공 한 후 20승(16KO) 2패를 남기고 1993년 11월 13일 15년간 소중했던 사각의 링의 추억들을 빗물 속에 흘려보내고 링과의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한다,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