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지내십니까… 1988 서울올림픽 영광의 얼굴들 ③김광선 복싱 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 [상]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복싱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김광선(오른쪽)이 샤후라이 비라이다르(인도)의 얼굴에 라이트 훅을 성공시키고 있다. 일간스포츠 발간 '1990 스포츠 사진 연감'적수가 없었다. 1980년대 중·후반 세계 아마추어 복싱 플라이급 최강자였다. 사각의 링을 지배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복서였다.
올림픽은 세계 최대의 스포츠 대제전이다. 그만큼 스포츠 선수라면 누구나 밟고 싶은 꿈의 무대다. 비록 메달리스트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출전 그 자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경연장이다.
콧수염 위의 무서운 눈매로 상대를 노려보며 쉴틈없이 몰아붙이던 '라이터돌', '작은탱크' 김광선. 1988 서울 올림픽 복싱 플라이급 주인공이다. 대를 쪼개는 듯 거침없는 기세로 내달려 금을 손안에 거머쥔 '상승장군(常勝將軍)'이다.
올림픽도 그에겐 걸림돌이 될 수는 없음을 온 천하에 알리듯 포효했다. 평천하를 이루는 데 밟아야 할 하나의 길이었을 뿐임을 소리 높여 외쳤다.

자신이 창설한 한 생활체육 복싱 대회에서, 김광선 관장(사진 가운데 오른쪽)이 입상자와 함께했다. 김광선 제공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그는 외연을 넓혔다. 방향을 달리했다. 그리고 새 지평을 열었다.
복싱을 생활체육 영역으로 이끌었다. 굶주림을 달래기 위한,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던 복싱에 대한 관념을 불식했다.
현대인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어우러짐을 통해 행복하고 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추구한다. 복싱은 이제 당당히 그 열망을 충족하는 좋은 길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복싱 = 웰빙(Well-being).' 인식의 변환에 따른 등식의 성립에선, 그의 헌신이 배어난다. 20여 년 동안 쏟아부은 그의 열정은 복싱이 생활체육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춧돌이 됐다. 그는 '생활 복싱 전도사'다.
◇ 복싱은 생활체육으로서 효용가치가 무척 높아
김광선 관장이 어린이 문하생들에게 원투 스트레이트를 뻗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최규섭 기자1998년 9월, 그는 새로운 인생의 막을 올렸다. '인생 2막'은 김광선 복싱체육관 창설로 비롯됐다. 이 땅에 생활체육 복싱을 뿌리내리리라 다짐하며 내디딘, 체육관 관장으로서 첫걸음이었다.
23년이 흐른 오늘 돌이켜 보면 소중한 한순간이었다. 한국 생활 복싱사의 한 쪽을 장식할 만한 뜻깊은 첫출발이었다.
"복싱에 대한 선입견을 타파하고 싶었다.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생활체육의 하나로서 복싱의 효용가치를 입증하려 했다. 목표를 명확하게 세웠던 데 힘입어 흔들리지 않고 한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는 낡은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세계를 휩쓸던 실력만을 앞세우거나 경험에 얽매이지 않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를 끊임없이 되뇌며 새 틀의 바탕이 될 이론 정립에도 힘썼다.
복싱 다이어트와 복싱 에어로빅은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내놓은 작품이었다. 1999년 1급 경기 지도자 자격증(복싱) 취득 때 쓴 논문 주제는 생활체육으로서 복싱 다이어트와 복싱 에어로빅의 효용성이었다.
미국에서, 복싱은 생활체육의 한 축으로 자리한 지 오래다. 그가 생활 복싱에 눈뜬 배경이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그가 추구한 방향성은 옳았음이 입증되고 있다. 갈수록 생활체육의 중요성을 깨닫는 현대인에게 생활 복싱은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추세가 두드러지게 엿보이는 오늘날이다.
객관적으로도 나타난다. 그동안 그의 손길을 거쳐 간 제자는 수만 명에 이른다. 정계·경제계·연예계를 비롯해 사회 곳곳에 포진한 제자들이 골골샅샅에 즐비하다.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대를 이어 그의 문하생이 된 부자도 있다.
그런 그에게 붙은 또 하나의 별호는 '영원한 전국구 스승'이다. 지금도 매년 스승의 날이면 김광선 복싱체육관은 스승의 은혜를 되새기며 전국에서 찾아온 제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김광선 복싱체육관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로에 자리하고 있다. 23년 전 첫 모습을 보였던 바로 그곳이다. 이제는 단순한 하나의 복싱 체육관을 넘어 동대문구 명물로 떠올랐다.
그뿐이랴. 한 단계 더 올라섰다. 한국 생활 복싱의 산실에서 총본산으로 도약했다. 세 개로 늘어난 김광선 복싱체육관은 건강한 삶을 즐기려는 생활체육인들로 넘쳐 난다. 경기도 성남시와 의정부시에 자리한 김광선 복싱체육관은 그의 대학교(동국) 후배들이 운영한다.
그가 생활 복싱 개척자로서 불태운 열정과 쏟은 심혈이 밑거름됐음은 물론이다.
◇ 천부적 자질은 화려한 발자취로 이어져 … 무패 행진 가도 내달려
1988 서울 올림픽 복싱 플라이급에서, 김광선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순간 기쁨에 겨워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발간 '1989 스포츠 사진 연감''자질을 타고났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의 복싱 자질은 천부적이다.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두들긴 지 1년 만에 국가대표에 발탁됐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
그는 한양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81년 복싱에 입문했다. 당시 중구 을지로에 있던 한국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한국체육관은 복싱을 비롯해 유도와 레슬링 등 여러 격투 종목을 개설해 가르쳤다. 그중 복싱의 매력이 단연 으뜸으로 다가왔다."
이듬해 태극마크를 단 이래 1988년 은퇴(아마추어)할 때까지 줄곧 국가대표로서 국위를 선양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까지는 라이트 플라이급을, 그 뒤로 1988 서울 올림픽까지는 플라이급을 각각 대표했다.
그가 각종 메이저 국제 무대에서 남긴 발자취는 화려하다. 1983년 로마 월드컵,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8 서울 올림픽 등을 휩쓸며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로마 월드컵 우승은 지금도 그에게 각별한 기억으로 간직돼 있다. 한국 복싱 월드컵 사상 첫 금의 소중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 라이트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그는 에스자노프(당시 소련)를 판정으로 꺾는 기염을 토했다.
아마추어 시절 그가 남긴 전적은 믿기 힘들 정도다. 211번 링에 올라 210번 승리를 구가했다. 그중 140승은 KO(RSC 포함)로 올렸다. 경기 내내 쉴 틈 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며 공략한 데서 나온 대단한 결과물이다. 경량급에서 찾기 어려운, 실로 엄청난 강편치를 자랑했다.
단 한 번 패배의 설움을 맛봤을 뿐이다. 그 1패는 LA 올림픽에서 당했다. 1차전에서 홈 링의 폴 곤잘레스에게 판정패했다.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 곤잘레스가 승승장구 끝에 금메달을 차지했으니, 그로선 매우 아쉬운 한판이었다.
"제3의 장소에서 열린 대회에선, 내가 이겼던 상대였다. 그만큼 분했고 허무했다."
4년 동안 절치부심했던 그는 서울 올림픽에서 맺혔던 한을 씻어 냈다. 1차전부터 3차전까지 모두 RSC승으로 장식했다. 기세를 몰아 8강전부터 결승전까지 압도적 기량을 뽐내며 손쉽게 판정승을 끌어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기만 했다.
그는 서울 올림픽의 영광을 뒤로하고 곧바로 은퇴한 뒤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국군체육부대 복싱 코치로서 후학 양성에 나섰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9년 뒤 생활 복싱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었을까? 그리고 어떤 마력(魔力)을 내뿜으며 오늘날 복싱을 생활체육의 중추로 올려놓았는지 그 비법이 궁금하다.
[하]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