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정의 축제이야기]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이유(上)

에이투비즈, 에딘버러축제 앞서 매년 BBC 통해 한국 작품 사전 홍보
변화무쌍한 에딘버러 날씨 얘기로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큰 호응

BBC 애프터눈 쇼에 출연한 권은정 에이투비즈 대표. 에이투비즈 제공

BBC 공개방송 ‘애프터눈 쇼 위드 그란트 스톳(The Afternoon Show with Grant Stott)’에서 나는 수백명의 관객을 한꺼번에 박장대소하게 하는 나의 케케묵은 기술을
또 한번 시전하고 있었다. 이 기술은 오직 에든버러에서만 통한다.

축제기간동안 BBC공개홀에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그 해 축제에서 주목받는 아티스트와 공연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그란트는 BBC의 진행자이자 27년간 에든버러의 Radio Forth 1에서 Daytime show를 진행한 DJ로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방송인이다. 주중 10시부터 2시까지 매일 4시간씩 데이타임쇼를 진행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올해 30주년을 맡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와 24년 된 최화정의 파워타임이 떠올랐다.

차를 타고 습관처럼 튼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세상이 아직 그 자리에 있고 내 삶도 그 안에서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는 묘한 소속감과 편안함을 준다.

에든버러 스트리트 퍼포먼스. 에이투비즈 제공

그란트는 쌍커풀이 짙은 눈에 푸근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아저씨였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입에서 가장 매력적인 영국영어의 대명사 ‘숀 코넬리(Sean Connery)’의 스코티쉬 엑센트(Scottish accent)가 튀어나왔다.

‘스코티쉬=스코틀랜드 잉글리쉬’는 독특한 엑센트(Accent)와 인토네이션(Intonation)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로 유명하다. 유튜브에 ‘Scottish accent’로 검색하면 재밌는 영상들이 가득할 정도다.

유튜브에서 여전히 인기있는 BBC 뉴스 클립 중 하나는 2011년 아이폰의 런던 런칭 기사와 함께 나오는 동네 주민의 인터뷰 영상이다. 스코틀랜드 에버딘(Aberdeen)에서 진행된 시리(Siri)의 ‘음성인식(Voice Recognition)’소프트웨어 테스트에서 시리는 랜덤으로 인터뷰한 주민들의 ‘Isn’t it a nice day?’, ‘Where am I?’같은 간단한 문장도 알아듣지 못한다.

또 다른 인기 영상 중 하나는 ‘음성인식 엘리베이터(Scottish Voice Recognition Elevator)’에 탄 두 남자의 눈물나는 도전기이다. 그들은 11층에 가고자 ‘일레븐(Eleven)’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십번 외치지만 엘리베이터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나의 첫 경험도 영상과 다르지 않았다. 1999년 8월 에든버러에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파든(pardon:뭐라구요)’이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잉글리쉬는 나에게 제주도 방언과도 같았다. 당시 프로덕션 매니저로 함께 일하던 태생부터 뉴요커인 미국 친구도 ‘Sorry?(대화 중 못 알아들었을 때 pardon처럼, ‘미안한데 다시 말해 줄래?’를 줄여서 Sorry?라고도 한다)‘를 남발했고, 우리는 대화 중 자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너는 알아들었어?’라는 눈빛을 주고 받았다.

코미디언도 아닌 내가 사람을 웃게 만드는 필살기란 에든버러 날씨에 관한 얘기다.

비오는 로얄 마일. 에이투비즈 제공

어느 해의 어떤 방송에서 처음 말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예상하지 못한 관객 반응에 본능적으로 캐치한 필살기. 에든버러 사람들은 날씨에 대한 농담에 가장 후한 웃음을 보인다. “에든버러는 어때요? 즐겁게 보내고 있나요?(How’s Edinburgh? Are you enjoying your stay?)” 그란트의 일반적인 ‘현지인’ 질문에, 나는 “날씨를 너~무 즐기고 있어요. (We’re enjoying the weather so much.)” 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예상대로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란트와 2명의 영국패널도 외국인 게스트의 예상치 못한 대답과 객석반응에 신선한 즐거움을 얻은 듯 함께 웃었다.

‘날씨를 즐기고 있다’는 이 평범한 대답에 큰 소리로 웃는다면 스코틀랜드 사람이 분명하다. 가끔 스코틀랜드 친구들은 날씨 얘기를 하면 겸연쩍게 웃으며 ‘미안하다(I’m sorry)’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기술’이라고 부르는 이 대답은 문장만 보면 지극히 평범하다.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그 첫 인터뷰에서 나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매년 8월 서울의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폐까지 시원해지는 에든버러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맑은 날씨의 에든버러 가든. 에이투비즈 제공

에든버러의 8월 날씨는 이렇다. 새벽 5시즈음 날이 밝기 시작한다. 태양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두시간이 지나고, 갑자기 비가 내린다. 한국에서 이런 먹구름을 본다면, ‘오늘 하루는 내내 비가 오겠군’이라고 생각할 만큼 주변이 어두워진다.

오전 9시, 비가 언제 내렸냐는 듯이 찬란한 햇살이 비춘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않는다. 햇살도 비도 먹구름도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끝없이 반복한다. 8월 평균 최저기온은 11도~13도, 낮기온은 18도~20도지만, 이 또한 매일이 다르다. 어떤 날은 초겨울 코트를 입고 나가도 춥고, 어떤 날은 반팔을 입고도 땀을 흘리며 걷는다.

에든버러 날씨에 대해 잘 모르고 방문한 사람들은 ‘날씨가 지랄맞다’라는 격한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겐 이 날씨 또한 에든버러를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이곳의 하늘은 매일의 놀라움이자 감사이자 기쁨이다. 나는 에든버러에서 걷던 걸음을 자주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잠시 내리던 비가 그치고 비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려오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맨눈으로 직관하게 될 테니…

에든버러 사람들은 말한다. “날씨가 좋을 때, 이 곳은 천국과도 같아. (When the weather is right, It’s like a paradise.)”

변화무쌍한 날씨 덕분에 우리는 도시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다. 수백년의 역사를 품은 올드타운의 건물들이 햇살을 받았을 때와 비에 젖었을 때, 황혼에 물들었을 때의 감동은 각기 다르다.

운이 좋다면 물안개가 낀 비밀스러운 골목에서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처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e Stevenson)처럼 셜록홈즈나 지킬 앤 하이드를 탄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든버러 코리아 시즌 버스 광고. 에이투비즈 제공

웃음이 잦아들자, 그란트는 질문을 이어갔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받는 질문은 매년 비슷하다. ‘코리안 시즌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몇 년째 하고 있는가’, ‘성과는 어떤가’, ‘처음 에든버러에 온 게 언제인가’, ‘그때와 지금의 에든버러는 어떻게 다른가’, ‘올해는 어떤 작품들을 가지고 왔는가’,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나에게는 한국의 문화와 그 해에 선정한 공연들을 알리려는 확실한 목적이 있고, 언론은 에든버러 축제에서 얼마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지 알리려는 목적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인터뷰의 질문과 대답은 정형화되어갔지만 결과물은 매번 달랐다. 어떤 진행자나 리포터를 만나느냐에 따라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재미있는 방송이 될 수도 있고, 딱딱한 정보전달 위주의 뉴스가 되는 경우도 있다.

동네아저씨처럼 푸근한 그란트는 과하지 않을 만큼의 친절과 위트로 게스트를 편안하게 리드하는 진행자였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친근한 그의 스코티쉬 액센트에 마음이 열렸고, 덕분에 친구와 수다를 떨 듯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글 : 권은정 에이투비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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