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HISTORY]전국체전 '金제조기' 2명 지도자… '메기효과'

김왕순… 지도자로 활동하며 소년체전 복싱사상 최다인 12개 금 획득
박봉관… 열악한 환경의 충남 예산군에서 제자들 육성 10개 금 만들어
복싱계 대부로 불리던 강석구를 대항한 '메기효과'로 보는 시각도

웰터급 동양챔피언 시절의 박봉관. 조영섭 객원기자

소년체전 복싱 사상 최다 금메달 획득자인 김왕순(대전 체육회 차장)씨. 김씨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소년체전에서만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1969년 충남 대전 출신으로 1981년 염동균 체육관에서 박만순 관장의 지도로 복싱과 연을 맺었다. 박 관장은 두 체급 챔피언 이열우를 비롯 중견복서 장수곤과 이경중을 발탁해 조련하면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김씨는 1986년 대전 체고에 입학해 한정훈 사단의 일원으로 전국 무대에서 활약했지만 후에 바로 셀로나 올림픽 대표인 김재경과 청소년대표인 허기주, 허준욱에게 6연패를 했다.

결국 1989년 2월 동료들이 경희대 (전용배. 남기춘). 한국체대 (최재기. 김승섭. 최인수) 등 명문대로 입성할 때 그는 용인대에 진학한다.

김씨는 그해 4월 연맹 회장배 W급에서 양만호 (호남대)를 꺽고 전국대회 출전 13차례 만에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탄력을 받아 그해 12월 제2회 마닐라 시장 배 국제대회에 한국대표로 출격, 결승까지 치고 올라가 몽골의 에바리아 하산에게 분패해 은메달을 땄다.

하산은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결승에서 한국의 양정모에 패한 몽골의 오이도프와 함께 국민적 영웅으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김왕순(사진 왼쪽)과 그를 발탁해 조련한 박만순 관장. 조영섭 객원기자

그는 1993년 2월 용인대를 졸업하고 은사인 한정훈 대전대 감독의 추천으로 그해 7월 충남체고에 복싱강사로 출발했다.

스승 한 감독의 좋은 DNA를 물려받았는지 강사로 출발한 첫해, 전국체전 M급에서 김연집의 금메달을 필두로 LF급 김태규 (대전대), Fe 박기표 (원광대) 장광훈, L급 박권영(경희대), W급 한상일, LM 최양선(용인대), M급 복영대, 김유신(용인대), LH 급 김용찬(대전대) 등 알토란 같은 선수들을 쉼없이 발굴했다.

충남체고에 재직한 3년 동안 3차례 종합우승과 함께 전국체전 금메달 8개 은메달 7개 동메달 5개를 획득했다.

특히 1995년엔 학생선수권 대회에서 박권영, 한상일, 김용찬 등이 3체급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려 종합우승과 함께 지도자상을 받았고, 박권영 선수는 최우수복서로 선정됐다.

1997년 대산 동산중으로 적을 옮긴 김씨는 담당교사인 오현일 선생과 하모니를 이뤄 각종 대회에서 종합우승만 6차례 차지하면서 문장호, 김혁, 정수상, 송인영, 양기헌, 최성진, 송대현, 정상영, 김정태, 최선민, 이철민, 이재성, 길태영, 김진현, 강희준, 양기헌, 이준영, 김경종, 박훈 등 소년체전 12개의 금메달을 포함해 모두 64개의 금메달, 43개의 은메달, 78개의 동메달 등 총 185개의 메달을 창출했다.

2000년, 20001년에는 그가 맡은 동산중고가 나란히 학생선수권 대회에서 종합우승을 했다. 또 연맹 회장배 대회에서 김씨가 담당한 대전 동산중, 한밭중, 송강중 등 3개 학교가 나란히 1, 2, 4위를 차지했다.

◇ 김왕순 못지않게 지도자로 金 일군 박봉관

소년체전 복싱 사상 최다 금메달 12개를 획득한 김왕순(사진 오른쪽). 조영섭 객원기자

김왕순씨 못지않게 지도자로 활동하며 소년체전 금메달을 수확한 또 다른 지도자가 있다.

박봉관씨는 인구 8만 명의 열악한 환경의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제자들을 육성, 소년체전 금메달 10개를 획득했다.

예산군은 한국복싱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성의경 선생의 고향으로, 한국복싱의 성지로 알려졌다.

성 선생은 1929년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에 한국최초의 복싱체육관인 조선 권투 구락부를 창설한 인물이다.

예산군은 아마 국가대표인 백승영, 신은철, 배경석, 김재경, 신동길, 박군순 등을 배출했고 프로복서로는 문태진, 차상준, 최응산, 유화룡, 김원경 등이 탄생한 고장이다.

박씨는 예산 중앙고에 입학해 예산체육관 권국상 문하에서 복싱을 수학했지만 떡 장사를 하는 모친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어려운 형편 탓에 경기에 출전할 경비가 없어 단 2차례의 경기만 출전한 후 중도 하차했다.

결국 군 복무 후 청양군청에 입단, 비로소 정상적인 훈련을 시작한 박봉관은 1991년 제72회 전국체전에 충남 대표로 출전 W급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현 국군체육부대 감독 이훈(부산 체육회)에게 판정패한 후 아마 생활을 청산했다.

1992년 신생 양광 체육관에서 프로로 전향, 장관호 사범의 지도로 그해 신인왕 우승과 함께 감투상을 받는다.

이후 박씨는 현대체육관에 이적, 박영균, 최희용 등 월드 챔피언을 배출한 김광수 관장의 조련을 받으며 11전 11승 7KO승을 기록했다.

27승 20KO승을 기록한 동양의 쿠에바스라 불리는 동양 W급 챔피언 박정오의 12차 방어 도전자로 내정돼 1994년 1월 벌어진 일전에서 치열한 타격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한다. 11차 방어에 성공 8차례를 KO로 방어한 세계타이틀전을 목전에 둔 박정오가 박씨의 맹공에 고전을 한 것.

이후 윤석현(대원)과 1995년 4월29일 동양 W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판정승을 거두며
동양 챔피언에 올랐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바로 예산 태생의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63주년 되는 뜻깊은 날이었다,

그해 11월 일본에 원정 요시노 히로유키에게 1ㅡ2로 판정패해 복싱을 접은 박씨는 1998년부터 고향 예산으로 낙향해 덕산중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1년 5월까지 국가대표 전병국(서울시청)을 비롯 강문구, 김기원, 정성철 (한국체대), 윤경환(서울시청) 등 5명을 발탁, 조련했다.

이들이 선봉이 돼 소년체전 금메달 2개를 포함해 10개의 전국무대 금메달을 획득했고 김씨는 팀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2001년 5월 팀을 떠난다.

이후 예산읍에 체육관을 설립하고 예산중 으로 적을 옮긴 박씨는 2004년 1월부터 조해성, 조해동, 이명관, 정지용, 김경식(한국체대), 조원빈, 박정현(용인시청), 김민우(서울시청)등 이 주축이 돼 소년체전 금메달 8개, 전국체전 금메달 8개를 포함해 무려 45개의 금메달을 각종 전국대회에서 획득했다.

반면 박씨가 떠난 덕산중고 는 자연스럽게 팀이 공중분해 된다,

박씨의 25년의 지도자 생활의 백미는 단연 이명관(영주시청) 과 조세형(대전대)이다.

2016년 리우올림픽 선발전 56Kg급에서 국가대표 간판 함상명(용인대)을 꺽어 파란을 일으킨 김주성(한국체대)을 제압, 태극마크를 달았던 이명관에 이어 2019년 세계선수권대회 49Kg급 에서 국가대표로 출전한 조세형(대전대)은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이때부터 박씨는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한다는 복싱계의 미다스 손(Midas Touch)으로 일컬어졌다.

박봉관과 김왕순, 두 지도자가 입지를 구축하며 급부상 할수 있었던 저변에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메기효과'가 작용했음을 부인 할수 없다.

복싱계의 대부로 불렸던 강석구 회장(사진 앞줄 가운데). 조영섭 객원기자

이들이 활동하는 충청남도 대천에는 강석구라는 걸출한 인물이 입지를 구축하고 있어 틈새를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복싱계 대부 강석구는 2011년 아시아 심판장을 역임한 사람으로, 1976년 고향인 충청남도 대천에서 선수양성을 시작해 1978년 전국무대 3관왕 조종득(용인대)을 시발로 1982년 청소년 대표 오종서(용인대), 1982·1986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이해정(한체대), 1987년 청소년대표 박현성을 조련했다.

2017년 작고 할때까지 헤비급 서철을 비롯 박완순, 이용호, 이치성, 하철환(경희대), 이강언, 조민행, 이민행, 김병렬, 김익수, 이승호, 황지운, 이경호 등을 배출했다.

2001년 전국체전에서 대전체육관 소속의 김기운, 박태일, 이준희가 3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김왕순과 박봉관은 강석구라는 막강한 경쟁자가 있는 환경속에서 생존했다. 다른 경쟁자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메기효과' 덕에 이들은 성장 할 수 있었다.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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