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정의 축제이야기] 그녀가 세상을 보는 시선 (下)

비평가, 서울초청으로 한국공연 사전홍보에도 연출 달라져 낭패
처음 작품 의도대로 고쳐가며 공연했지만 관객들의 흥미잃어 실패

건축 중인 롯데월드 타워. 스마트 이미지 제공

2012년 5월, 에든버러축제 상연을 확정한 한국공연의 사전 홍보를 위해 켈리와 또 한 명의 저널리스트를 서울로 초대했다.

현지 홍보대행사와 협의 후 진행한 이번 출장으로, 우리는 스콧츠맨과 더 리스트 매거진, 그리고 젊은 층이 많이 보는 일간지에 각각 프리뷰 기사를 작성할 계획이었다.

해외에서 만난 친구들을 한국에서 본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다. 에든버러에도 한식당이 있고, 매년 축제에서 한국공연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현지에서 오감으로 경험하는 이국적인 느낌을 조금도 대체할 수 없다. 단편적으로 선보이던 우리 문화를 온전히 소개할 수 있는 3박 4일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비행기의 중간 경유(transit)을 포함하면 거의 17시간을 날아오는데 겨우 3일 밤을 보내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비즈니스 트립인지라 체류기간을 늘릴 수는 없다고 했다. 정해진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여 서울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면서 시차적응에 걸리는 시간은 점점 늘어난다. 20대엔 '시차가 모야?'라며 도착하면 바로 현지에 적응했지만, 이제는 거의 5일정도가 지나야 몸도 마음도 현지의 시간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전통 한국 단청. 스마트 이미지 제공

켈리는 푸석한 얼굴을 하고도 열정적으로 한국의 문화를 흡수해 나갔다. 우리가 계획한 기획기사에는 공연소개만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그 공연을 탄생시킨 한국이라는 나라, 서울이라는 도시를 소개하고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해외에서 친구들이 서울을 방문할 경우, 나는 가능한 다양한 식문화를 경험하게 한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탑재하고 있는 한국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나도 탑재하고 있다. 궁중요리, 전주식 한상차림, 사찰음식, 광장시장, 포장마차 그리고 다양한 한국의 BBQ가 나의 식문화 체험코스다.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이틀에 한 번 정도 빵이 그리울 수도 있는 친구들을 배려해 브런치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배치하기도 하지만, 3박4일 일정 안에는 들어갈 틈이 없다.

모든 음식이 친구들의 탄성을 자아내지만, 그 중에서도 이들의 기억 속에 가장 오래 남는 건 한국의 BBQ다. 외국인들에게 '구워 먹는 고기'는 모두 'BBQ'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지만, 이 단어는 우리나라의 다양한 불과 불판, 그리고 고기를 굽는 현란한 스킬을 담아내지 못한다.

한국의 BBQ는 가히 '퍼포먼스'라 부를 가치가 있다. 나는 그 다양한 실체를 경험하며 놀라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

켈리는 쌈을 좋아했다. 손에 상추와 깻잎을 들고 한 점의 고기와 자신이 선택한 각종 재료를 넣어 스스로 만들어 먹는 그 행위 자체가 즐겁다고 말했다. 너무 맛있다는 감탄사와 함께, 그녀는 야채를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는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우리의 쌈은 샐러드로 먹는 야채와는 '양'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샐러드를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듯이, 푸른 잎 3~4장을 썰어 넣는 것만으로 샐러드 볼은 금세 터질 듯 가득하다. 에든버러에서도 우리의 대화에는 그녀의 서울방문기가 자주 언급된다.

켈리는 지금도 '아무리 배가 불렀어도 그때 남긴 그 음식들을 다 먹고 왔어야 했어…' 라는 후회와 함께 입맛을 다신다.

우리나라 전통 공연. 스마트 이미지 제공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방문의 주목적인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 관람 전, 나는 꽤나 장황하게 불필요한 니주(?, 복선, 밑밥 등의 뜻을 가진 일본식 표현)를 깔았다. 이 공연의 연습기간이 얼마나 되고, 창작 퍼포먼스의 초연이라 남은 기간 동안 계속 업그레이드를 해 나갈 계획이고, 이 작품에 참가한 창작진과 배우가 얼마나 믿음직한 사람들이고… 등등.

켈리는 전문가다. 나보다 긴 시간 공연예술계를 지켜봐 온 사람.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으레 따뜻한 미소와 함께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며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창작공연의 초연이니 충분히 감안하고 볼 거라고, 그 가능성을 보고 얘기해 주겠다고…

공연이 끝나고, 나는 애써 나의 궁금증을 누르며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로비로 이동할 때까지 켈리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궁금해 할 나를 위해 다른 관객들이 객석을 빠져나가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퍼포먼스는 신선했고, 캐릭터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아기자기한 스토리라인이 맘에 들었다고. 얘기하는 내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눈을 보니, 8월 공연에 대한 나의 걱정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7월 말 서울의 연습실에서 공연의 마지막 런(Run-through)을 본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에든버러 프린세스 가든. 에이투비즈 제공

8월 첫째 주, 에딘버러 프린지에서 열린 프레스콜.이미 언론 초청을 마친 현지 홍보담당 친구들과 나는 공연장 앞에서 좌불안석이었다. 특히, 켈리를 볼 면목이 없었다.

초연 이후, 프로덕션은 내부의 분분한 의견으로 연출을 바꿨다. 이후 두 달여, 제목과 기본요소가 되는 퍼포먼스 이외에 공연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 있었다. 극작이 명확하고 텍스트의 힘이 강한 공연도 연출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색감의 작품으로 발현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넌버벌 퍼포먼스다. 대사가 없는 비언어극은 연출이 시놉시스를 쓰는 경우가 많다.

퍼포먼스의 메인 무기인 비보잉, 무술, 타악, 무용, 마술 등의 볼거리를 미리 선택하고 공연을 제작하기 때문에, 각각의 재능을 탑재한 배우 캐스팅이 끝난 공연의 퍼포먼스를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캐릭터와 스토리는 연출에 따라 완전히 바뀔 수도 있는 게 비언어극이다.

두 달 동안 공연이 어떻게 업그레이드됐는지 보러 온 켈리는 이내 울상이 되어 나왔다. 공연에는 그녀가 맘에 든다고 했던 '캐릭터들이 쌓아가는 관계의 구도'와 '아기자기한 스토리라인'이 사라져 있었다.

서울 방문 후 작성한 그녀의 프리뷰는 7월 말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기사로 나갔다. 자신이 작성한 글의 내용이 거짓이 되는 상황…

5월 말 프로덕션에서 연출을 바꾸고 두 달의 업그레이드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나도 그녀도 그 누구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업그레이드'라는 단어는 현재 창작해 놓은 작품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작업으로 인지될 뿐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비오는 로얄 마일. 에이투비즈 제공

각자의 취향일 수 있으나, 우리는 스토리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작품을 본다. 볼거리의 나열,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소품 공연'에 대한 호불호의 얘기가 아니다. 개인적인 성향이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공연'을 선호한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얘기다.

인위적이지 않은 살냄새 나는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부류이기에, 캐릭터(사람)를 배제한 채 흑백의 경쟁구도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공연은 정이 가지 않았다.

울상을 한 얼굴을 하고도, 그녀는 나의 무거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엔젤라, 괜찮아. 네가 이미 공연은 수정될 거라고 말했었잖아. 이해가 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Angella, It's OK. You already told me that there will be changes. I fully understand. That happens.)"

켈리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는 사람. 눈빛이 따뜻한 사람. 늘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유리처럼 투명한 눈을 통해 전해지는 사람. 엄마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 나의 세상은 그녀가 있어 조금 더 좋은 곳이 된다.

"The world is a better place with you in it. / 세상은 당신이 있기에 더 나은 곳입니다."

[PS.]
제작자의 판단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의심과 고민은 창작진을 섭외하기 전까지 하는 것이고, 작업에 들어가면 각 영역의 전문가들을 믿고 맡겨야 한다. 창작 초연에 만족스러운 공연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함께 한 그들이 문제점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 작품에 오래 몰두하면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기 마련이다. 퍼포먼스의 경우, 이제는 일반화된 쇼닥터의 활용이 공연의 '업그레이드'에 주요하게 작용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외부 전문가들은 작품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있고, 초기 창작진들이 '내 공연'이라는 애착과 고집으로 쥐고 있는 불필요한 장면들을 정리하는 좋은 해법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프로덕션은 심각성을 인지했고, 공연은 다시 오리지널 연출과 함께 5월 버전으로 되돌리는 연습에 돌입했다. 매일 연습을 하며 바뀐 부분을 반영하여 다음 날 공연을 하는 최초의 공연 방식이 시도되었다.

배우와 스텝들 모두가 진이 빠지는 작업. 공연은 이도 저도 아닌 내용으로 그렇게 한 달간 변화하며 축제의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안타깝지만, 예상한 결과로 공연은 그해 좋은 평점을 받지 못했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