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HISTORY]비운의 복서 한정훈… 지도자로 부활, 金 행진

허영모에게 7전7패로 태극마크 못달고 한체대 졸업
대전체고 지도자로 새출발·· 제자들에게 경험 토대로 한 전략 전수
35년간 국가대표 26명 배출, 전국체전 금메달 72개·국제대회 금메달 부지기수

90년 마닐라 국제복싱대회에 코치로 나간 한정훈(사진 왼쪽). 조영섭 제공

1928년은 제1회 전조선 복싱선수권대회가 창설돼 우리나라의 복싱 원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한 세기에 달하는 한국복싱 역사의 물줄기 속에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전광역시 복싱협회 12대 회장이자 대전대 복싱 감독을 겸직하고 있는 한정훈이 그 주인공.

충남 대덕 출신인 한정훈(1962년생)은 대전체고와 한국체육 대학을 졸업했다. 대전체고를 거쳐 대전중구청. 대전대 감독을 맡아 다수의 국가대표를 양성한 지도자다.

1978년 충남 종합체육관에 입관, 김종태 관장 문하에서 복싱을 배웠다. 선천적으로 반사신경이 좋아 물찬 제비처럼 빠르고 날렵하다는 평을 받았다.

한정훈은 복싱의 4S(Speed·Skill·Strategy·Sense)를 겸비한 전형적인 업 라이트 (Up right) 복서 형으로 1979년 60회 전국체전 '코크급'에서 서울 대표 장관호(원진체)와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승에 오른다.

장관호는 그해 학생선수권대회에서 전년도 최우수복서 윤영환(동국대)을 꺽은 신흥강호였다.

79년 제60회 전국체전 복싱에서 금메달을 딴 한정훈(사진 오른쪽 아래). 조영섭 제공

결승전 상대는 경기대표 김종옥(성일고). 80년 김명복 배 준결승에서 천하의 허영모 를 꺽은 베테랑으로 81년 3월 킹스컵. 5월 마르코스 배, 6월 제 1회 월드게임.에 각각 국가대표로 출전한 톱 복서 선수였다.

언더독 으로 평가받던 한정훈은 예상을 뒤업고 김종옥을 잡고 LF급 곽동성(전북), B급 홍동식(부산), Fe급 박기철(전남), M급 이남의(전남) 등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탄력을 받은 그는 그해 10월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 출전했다. 맞붙은 선수는 78년 방콕아시안게임 LF급 국가대표로 본선에서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은메달 북한의 이병옥에 2ㅡ3 으로 패한 홍진호(육군)였다.

여담이지만 홍진호가 북한의 이병욱 에 패하자 북한의 IOC 위원장 장웅이 링 위에서 세레모니를 연출하고 내려오자, 한국의 조철제 단장이 득달같이 달려가 장웅의 뺨을 후려갈긴 전대미문의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었다.

베테랑 홍진호와 맞대결한 한정훈은 팽팽한 접전을 펼쳤지만 3ㅡ2로 패한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본 관계자들에 의해 한정훈은 올림픽 최종선발전에 홍진호를 밀어내고 장흥민, 김명환, 홍동식과 함께 참가한다. 그만큼 한정훈의 기량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정훈은 79년 세계청소년대회 결승에서 미국의 로버트 샤논 에 판정패 한 홍동식(동아대)에게 4강에서 고개를 숙인다.

샤논은 84 LA 올림픽 16강에서 문성길과 맞대결한 바로 그 복서이다.

80년 9월 제30회 학생선수권대회 LF급 에서 5전 전승으로 F급의 권채오, B급의 강성덕, L급의 하종호, W급의 이해정과 동반 금메달을 획득하며 전열을 추스린 한정훈은
그해 12월 제34회 전국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허영모와 맞붙는다.

한정훈은 이 대결에서 쓴잔을 들이킨다.

이후 한정훈은 제8회 김명복 박사배 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세계군인선수권 금메달 성광배 (한국체대)를 비롯 82년 대학선수권 LF급 우승자 천인호와 F급 우승자 김상찬(이상 한국체대), 킹스컵 대표 윤승희 (경희대), 청소년대표 오종서(용인대), 전국체전 은메달 최태영 (예산복싱) 등을 모조리 잡았다.

그러나 84년 LA올림픽 선발전, 85년 제15회 대통령배 준결승에서 유독 한국체대 1년 후배인 허영모의 높은벽을 뚫지 못한채 마치 솔개를 만난 병아리처럼 옴짝 달싹 못하고 기록적인 7전 7패를 기록한다.

결국 한정훈 은 태극마크 한번도 달지 못하고 86년 2월 한국체대를 졸업한다.

그리고 87년 대전체고 복싱 지도자로 새 출발 한 그는 허영모와 대결에서 전략 전술의 부재로 인한 자신의 완패를 인정하고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획(Next Plan)을 가동한다.

거북이가 토끼를 상대해 뭍에서 경주를 펼치면 백전백패지만 물속에서 레이스를 펼치면 잡을 수 있다는 역발상을 한 것이다.

한정훈은 경기가 펼쳐지면 어느 쪽이 이기고 지는 것은 미리 정해진 게 아니라 상황이나 여건을 어떻게 바꿔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교하고 치밀한 전략을 세운다.

첫 작품은 F급의 최재기였다.

학생선수권과 전국체전에서 제2의 허영모라 불리는 컴퓨터 복서 김경일(리라 공고)(경희대)과 조인주(동국대)를 각각 3회 RSC로 와 판정으로 연속적으로 잡으며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황철순 사단의 황태자 김경일 조인주는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친 정상급 복서였는데 87년 세계청소년 대회 은메달의 조인주가 최재기에게 두 번의 다운을 당하며 전국체전에서 완패한 것은 당시 큰 충격이었다.

첫해부터 한정훈의 대전체고는 Cork급의 김창복, LF 남기춘, F급 최재기, B급의 김홍구, Fe 전용배, L급 이경석, LW 김왕순, W급 최인수, LM 이승언, M급 박현성, 이명석, H급 김승섭이 전방위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리라공고의 황철순, 서울체고의 이흥수 감독과 함께 3강의 한 축을 담당한다.

한정훈사단 황태자라 불린 임재환과 포즈를 취한 한정훈 회장(사진 왼쪽). 조영섭 제공

그후 대전체고 2세대인 고지수, 임재환, 신은철, 김승택, 이재현이 독수리 5형제 편대를 형성해 학원 스포츠를 또다시 평정했는데, 특히 B급의 고지수는 4관왕에 베스트 복서로 선정됐다.

1991년에 이를 발판으로 한정훈 감독이 대전대학을 창설, 대전 복싱의 활로가 크게 열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대전대학, 대전체육회 연합 복싱팀과 함께한 한정훈 회장(사진 중앙). 조영섭 제공
그가 35년간 복싱 현장에 있으면서 배출한 국가대표는 신은철, 임재환을 필두로 고지수, 남기춘, 최인수, 김승택, 김태규, 송인준, 양현태, 이경렬, 이재현, 최진우, 박재갑, 심현용, 정재구, 홍민, 장형욱, 백종섭, 홍인기, 윤경민, 도정현, 송대현, 임현식, 임현철, 조세형, 배영식 등이다. 무려 국가대표 26명을 지속적으로 배출한 것.

한정훈 감독이 가장 권위 있는 전국체전에서 걷어 올린 금메달만 무려 72개인데 송대현과 심현용은 4연패를 달성했다.

대전대학은 소수 정예부대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지방대학이었기에 그 위상은 더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 중심엔 한정훈 감독이 있었다

국제무대로 시야를 넓혀보면 고지수가 92, 95년 서울컵 2연패등 3관왕을, 임재환이 93년 제15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 신은철이 97년 세계선수권 동메달, 최진우가 98년 아시안게임 동메달, 김태규가 99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을 획득했다.

또 송인준이 새천년 제5회 서울컵 금메달, 2001년 동아시아대회 금메달, 백종섭이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60Kg급 은메달, 임현철이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은메달을 뽑아내며 메달 퍼레이드를 펼쳤다.

한정훈을 키운건 8할이 허영모였다. 역대급 복서 허영모 에게 당한 7연패로 눈물 젖은 빵을 곱씹었던 한정훈이 이를 발판으로 지도자로 재약진, 인생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쓰러린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악조건인 상황을 능동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급선회, 국보급 지도자로 재탄생한 한정훈의 건승을 바란다.

조영섭 객원기자(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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