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지내십니까 … 1988 서울 올림픽 영광의 얼굴들' ②
김재엽 유도 –60㎏급 금메달리스트 [상]이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랴. 1988 서울 올림픽 유도 남자 –60㎏급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김재엽(오른쪽)이 깍지 낀 두 손을 치켜들고 기쁨에 겨워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발간 "1989 스포츠 사진 연감". 기린아(麒麟兒)는 어느 날 풍운아(風雲兒)가 됐다. 1980년대, 천부적 기재를 바탕으로 세계 유도계를 풍미했다. 1990년대 후반, 홀연 유도계를 떠났다. '파벌·학연론' 주창에 따른 절연(絶緣)이었다.
방황의 세월이었다. 동국대학교(1999년)와 순천향대학교(2001년)에서 강단에 섰으나 여의치 않았다. 타의에 의해 물러났다. 사업의 뜻을 키웠다. 그렇지만 세상사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새로운 인연이 다가왔다. 내민 손길을 맞잡았다. 후학 양성의 길이 열렸다. 2004년, 그렇게 '인생 2막'이 올라갔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경호 스포츠 선구자로 탈바꿈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제1호 경호학 박사의 영예가 뒤따랐다. '교수 김재엽'으로 자리매김한 동서울대학교(총장 유광섭) 스포츠학부 부장의 눈부신 변신이다.
◇ 나라의 동량을 육성… 도전 정신 배양과 인성 함양 강조'流水不腐(유수불부).'
중국 진나라 때 여불위가 편찬한 사론서 겸 백과사전인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말이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곧, 움직임 속에 생명력이 깃들어 있음을 강조한 문구다.
동서울대학교 5호관에 자리한 김재엽 교수 연구실 한쪽 벽엔, 이 글귀의 서예 작품 현판(
위 사진)이 걸려 있다. 글 뜻처럼 살아서 움직임을 내비치려 함일까? 액자(額字)의 한 글자마다 힘에 넘치는 운필이 배어난다.
그의 좌우명이 농축돼 있음도 엿보인다. 그는 늘 제자에게 강조한다. "끊임없이 도전하라." 도전 정신은 오늘날의 그를 존재하게 한, 그의 마음속 깊숙이 새겨 둔 가장 소중한 덕목이다.
'18년.' 그가 경호 스포츠라는 한 우물을 판 햇수다. 25년, 유도와 맺었던 연의 햇수에 거의 다다랐다. 그는 대구 남산초등학교 4학년(1974년) 때 처음 유도복을 입었다. 그리고 1998년 유도복을 벗었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으로 곧잘 비유된다. 그의 인생극은 유도에서 경호 스포츠로 막이 바뀌었다. 한국 경호 스포츠계의 중진 반열에 올라선 그의 경륜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정성 어린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1,000명 가까이에 이른다. 이제 사회 각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떠받치는 기둥과 들보가 된 제자가 즐비하다.
"인성 함양에 초점을 맞춰 가르쳤다."
깊은 연륜에서 체득한 그의 인재 양성법의 두 축은 도전 정신 배양과 인성 함양이다. 참된 가치관과 기술을 아울러 갖춘 미래의 인재를 기른다는 그의 교육 철학이 농축된 두 절대 요소다.
인격과 기술이 겸비된 전인교육의 실천이라는 동서울대학교의 창학 이념과도 맥이 닿음을 읽을 수 있다.
◇ 방황과 인고의 세월 딛고 경호 스포츠 학자로서 다시 태어나후학 양성의 길을 걷는 김재엽 동서울대학교 교수에게선, 학자의 풍모가 배어 나왔다. 그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장서를 소개하는 모습이다. 최규섭 기자 1988년 9월 25일 장충체육관, 그에겐 잊을 수 없는 날과 무대다. 서울 올림픽 남자 유도 –60㎏급의 주인공은 그였다. 완벽한 경기력으로 일군 금빛 메어치기였다. 64강전부터 결승전까지 여섯 판을 치르며 단 한 차례도 상대에게 유효한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올림픽 성화가 꺼졌다. 그는 정점에서 미련 없이 은퇴했다. 그리고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그의 화려했던 자취도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1983 마야궤스)-아시안 게임(1986 서울)-세계 선수권 대회(1987 에센)-올림픽(1988 서울)에서, 잇달아 정상을 밟으며 군림한 '유도 제왕'이었다.
1988 서울 올림픽 유도 남자 –60㎏급 결승전에서, 김재엽(뒤쪽)이 케빈 아사노(미국)를 압박하고 있다. 일간스포츠 발간 "1991 스포츠 사진 연감". 그는 지도자로서도 역량을 보였다. 쌍용(1989~1993년)과 마사회(1994~1998년)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윤동식과 추성훈 등 인재를 길러 냈다.
1996년 5월 7일 올림픽 제2체육관(당시), 그에겐 역시 잊을 수 없는 날과 무대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유도 국가대표 최종 평가전에서, 그는 분노의 일갈을 터뜨렸다. 애제자 윤동식이 석연치 않은 패배를 당하며 올림픽 티켓을 놓친 데 따른, 벽력같이 내지른 고함이었다.
"학연과 파벌에 따른 국가대표 선발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유도계에서 공감대를 이룬 주장이었다. 그러나 역린을 건드린 형세였다. 대한유도회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유도 생명'을 끊는 징계까지 내렸다.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당연히 도려내야 할 부끄러운 환부를 밝혔을 뿐이다."
다시 길을 찾으려 나섰다. 그러나 신은 그가 걸어가야 할 두 번째 길을 쉽게 내보이지 않았다. 혹독한 담금질로 다시 태어날 그를 활용하려는 뜻이었나 보다.
방황과 인고의 시간이 흘러갔다. 2004년, 누군가 그에게 새로운 인연의 손길을 내밀었다. 뜻밖의 순간이었다.
그의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그에게 주어진 새 운명은 경호 스포츠 개척자였다. 경호 스포츠 학자로서, 그는 인생 2막을 새로 올렸다. 엘리트 체육인에서 생활체육인으로 변모해 가는 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누가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을까? 또한, 그는 어떤 생활체육으로 인생의 활력소를 얻고 있나? 궁금했다. 그래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