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닛산스타디움에서 열린 축구 한일전에 출전한 이강인(왼쪽)이 요시다 마야와 볼을 다투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한국 축구가 지난 25일 일본전에서 0-3으로 대패했다. 팬들은 굴욕적 패배에 분노했고, 대표팀 벤투 감독과 선수단에 대한 질타를 이어갔다.
급기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대국민 사과까지 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일본에게는 가위바위보조차 지면 안된다는 국민정서는 해방 후 76년이 지난 현재도 유효하다.
협회는 일본의 요청에 별 준비 없이 대표팀을 파견했다. 7월 도교 올림픽 앞두고 붐 조성이 급했던 일본은 성화 봉송 첫날 국민적 관심을 끌 대형 이벤트를 기획했고, 축구 한일전은 그들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한국은 손흥민 황의조 황희찬 등 공격 삼각편대가 빠졌지만 명색이 국가대표 1진을 파견해 대패했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다.
한일전이 열린 요코하마 닛산스타디움에 내걸린 양국 국기. 대한축구협회 제공 스포츠의 한일전은 단순한 경기 이상이다. 한국과 일본이 펼치는 숙명의 라이벌전은 치욕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이 땅에 축구 야구 등 서양 스포츠가 도입되자마자 스포츠는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일제 강점기 국권을 빼앗긴 피식민국가 젊은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울분을 토해냈다. 스포츠에서 만큼은 일본에 지면 안되었다.
서양 스포츠를 한발 앞서 받아들였던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엄청난 훈련량을 견뎌야 했고 규율 또한 엄했다. 한때 한국 스포츠의 강점이라 불리던 강한 정신력과 투쟁심, 거친 몸싸움은 이같은 배경을 뒤로 하고 있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일본과의 예선전을 앞두고 대표팀은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빠져죽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일본 원정경기를 치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결과는 일본전 역대 최다 점수차인 5-1 승리였다.
해방 후에도 면면이 이어온 이같은 결기가 근년 들어 퇴색해진다는 느낌은 필자만이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퇴색의 결정적인 이유는 정부의 스포츠 정책 탓이다. 성적 지상주의를 버리고 생활체육을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혹독한 훈련을 견뎌야 하는 엘리트 선수 양성 과정에는 반인권 프레임을 걸었고, 권위주의적 훈련에는 폭력 프레임까지 더했다. 물론 구타와 강압을 비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권위주의적 훈련은 구시대적 유물이며 이제는 소통과 대화로도 훌륭한 성적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에 내재된 핵심은 경쟁이고 경쟁하는 이상 승리는 목적이 된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불사하는 선수들에게 인권을 얘기한다면 경쟁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다. 선수로서 인생을 설계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경기장은 일정한 규칙아래 승부를 겨루는 곳이지 인권을 겨루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에게 굳이 인권의 잣대를 들이대면 야간 자율학습 뒤 한밤중에 다시 학원버스를 타야하는 대다수 입시생에게도 동일 잣대를 대야 하지 않을까.
공부하는 학생의 비정상적 생활은 정당한 것이고 선수로서 인생을 설계하는 운동선수의 훈련은 반인권적인가.
생활체육에 정부예산을 투입해 전 국민이 골고루 혜택을 보게 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정책이다. 하지만 엘리트 선수를 육성해 국제 대회에서 국가위상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25일 한일전에서 참패한 한국선수들이 허탈해 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혹자는 "이제는 메달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사람은 이번 축구 한일전에서 졌을 때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을까. 분노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분은 나빠야 한국인이 아닐까.
수년 전부터 엘리트 스포츠를 겨냥한 각종 추문과 정부의 상대적 무관심 탓에 이번 도쿄 올림픽에선 한국의 성적이 곤두박질 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일본은 지난 40년 가까이 자신들을 이겨온 한국 스포츠를 꺾기 위해 우리와 달리 근년 들어 엘리트 선수 육성에 박차를 가해왔다.
"노메달이라도 괜찮아" "일본에 져도 돼" 라고 전 국민이 동의해준다면 모를까, 이번 축구 참패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보면 우리는 여전히 승리에 목말라 있다. 특히 일본전만큼은.
서완석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