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정의 축제이야기]내인생의 선물, 페스티벌- 다시 막이 오를 "코리안 시즌"을 기다리며 (下)

에딘버러축제에서 가장 사랑받는 공연 "코리안 시즌"의 탄생부터 우선 멈춤까지

에든버러 프린지 가게 앞 권은정 에이투비즈 대표. 에이투비즈 제공

2013년 8월.. 평소 같았으면 쉽게 끝을 냈을 사워도우 토스트(Sourdough Toast)가
반쯤 남아 있었다.

빵 위에 있는 아보카도와 연어를 골라 먹고는 플레이트를 옆으로 밀고 카푸치노 잔을 앞으로 당겨오며 나는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작년까지는 크게 관심 갖지 않았으나 올해 부쩍 눈에 띄는 '시즌'공연에 대해 물어보았다.

"사우스 아프리칸 시즌(South African Season)을 하던데, 시즌 공연은 뭐가 달라?"

그때까지 우리가 일하는 방식은 이랬다. 우선 내가 제작한 작품이나 해외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한국공연 중 가능성이 높은 작품을 어셈블리 예술감독인 윌리엄에게 소개하고 어셈블리의 프로그래머, 프로듀서들과 의견을 나눈다.

작품의 와우 포인트(Wow-point)와 위크 포인트(Weak-point)를 분석하고 홍보마케팅으로 부각시킬 부분에 대한 의견도 교환하고 어느 규모로 어떤 극장에 어느 시간대에 배치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지 의논하고 함께 최종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협의는 전년도 12월부터 해당년도 2월까지 진행되고 그 후로 5개월간의 준비과정과 8월 한달간의 공연을 진행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많아야 1~2작품을 최종 결정해서 어셈블리에 올리곤 했었고 어셈블리와 연합인 Big 4 공연장에도 각 작품의 특징에 맞는 공연장을 매칭해서 공연을 상연하곤 했다.

"해당 국가의 공연을 쟝르별로 선별해서 다채로운 문화를 선보이는 목적으로 시즌을 진행하지. 어느 프로덕션에 집중된 하나의 작품을 올리는 게 아니니까." 윌리엄이 말했다.

"그래? 우리는 벌써 10년 넘게 공연을 같이 올리고 있는데, 왜 나랑 '코리안 시즌' 하자고 안 했어?"

"네가 하자고 안 했잖아."

"아… 그렇구나. 그럼 우리도 코리안 시즌 하자." 나는 웃으며 제안했고 "그래" 하고 윌리엄도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한장짜리 협약서를 쓰고,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5년부터 코리안 시즌을 진행하기로 약속했다.

해외공연을 다니기 시작한 1999년부터 나의 억울함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에든버러 축제. 에이투비즈 제공

한국공연을 처음 접한 외국인 관객들은 공연을 즐기면서도 국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아시아에서 온 공연이구나…'가 전부일때가 많았다.

그냥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차라리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몇몇 관객은 공연이 끝나면 다가와 "중국공연인가요? 아님 일본공연?(Is this from China? Or Japan?)"이라고 물어왔고, "한국에서 왔습니다!(We're from Korea!)" 라고 답하면, '한국도 공연을 만드는 줄 몰랐다'는 등의 어이없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도 지금도 나는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라스베가스, 영국 웨스트앤드 이외에 백개 이상의 공연장이 모여 있는 도시, 매일 새로운 콘텐츠가 상연되는 도시가 한국의 서울 외에 또 어디에 있는가.

당시 나의 억울함은 한국의 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욕심으로 바뀌었다.

에든버러의 어셈블리 공연장은 진입 문턱이 높기로 유명하다. 매년 2천개의 공연이 어셈블리 공연장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그 중 2백개의 공연이 선정되어 상연된다.

프린지에는 선정과정없이 대관료만 내면 공연할 수 있는 공연장도 많다.

무한경쟁의 축제 환경에서 최고의 공연장에서 공연한다는 건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공연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건 아니며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작품성이 없는 건 아니다.

당시 나는 10여 년간 어셈블리와 함께 대중에게 사랑받는 '잘 팔리는 공연'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매년 몇몇의 한국공연이 축제를 찾아와 이름없는 공연장에서 이름없이 공연하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

누군가는 에든버러에서 공연을 올리는 게 꿈이라고 했고 그 꿈을 위해 넉넉하지 않은 예산으로 혹은 부채를 안고서 힘겹게 세계의 무대를 두드린다.

2013년 에이투비즈와 어셈블리의 '코리안 시즌' 협약으로 우리는 한국공연을 조금은 유리한 출발선에 세우는 기회를 만들었다.

공연장이 수십 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신뢰를 등에 업고 한국의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파이가 마련된 것이다.

그 날 깨달았다. 누군가 먼저 손 내밀어 제안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2014년 12월 우리는 제1회 코리안 시즌 공고를 올리고 공연팀들로부터 신청서와 소개자료, 동영상이 첨부된 지원서를 받고 퍼포먼스, 피지컬 씨어터, 음악, 무용, 전통공연 등 쟝르별로 3배수 공연을 1차 선정했다.

나와 윌리엄을 포함한 5명의 선정위원이 1차 선정한 공연들의 풀영상을 보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고 그렇게 5작품을 최종 선정했다.

2015년 첫 선을 보인 '코리안 시즌'은 현지에 성공적으로 런칭하였고 매년 그 브랜드 가치를 쌓아가고 있다.

2019년 72년 역사의 프린지는 전세계 63개국에서 참여한 3,800개의 공연이 320개의 공연장에서 6만회의 공연을 마쳤고 제5회 코리안 시즌도 4개의 트로피와 현지 언론의 최고 평점을 받으며 한달간 126회의 공연을 마쳤다.

2018년 8월 어셈블리 갈라 공연은 만석이었다. 축제의 공식일정은 8월 첫째주 금요일부터 마지막주 월요일까지지만 어셈블리는 축제 시작일 이틀 전에 프리뷰 공연을 시작한다.

매년 가장 기다려지는 이벤트인 어셈블리 갈라 라운치(Assembly Gala Launch)는 8월 첫째주 수요일 저녁 8시에 정확히 올라간다.

에든버러 거리 속 코리안 시즌 포스터. 에이투비즈 제공

어셈블리가 선정한 220여개의 공연 중 12개정도의 하이라이트를 선보이는 이 무대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공식적인 오프닝 파티와도 같다.

에든버러의 랜드마크인 어셈블리홀(Assemblyhall. 국회의사당)에서 열리는 이 갈라공연은 지난 2년 연속 아일랜드의 유명 코미디언 제이슨 번(Jason Byrne)이 진행을 맡았다.

대본없이 현장의 상황에 맞게 관객을 이끌며 웃음을 만들어내는 특유의 익살은 한 공연의 하이라이트 무대가 끝나고 다음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 관객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놓았다.

제이슨의 악의없는 유치한 말장난은 늘 나를 무장해제시켰고 다음 해 사회자가 바뀌었을 때 나의 서운함은 옹졸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비판으로 바뀌었다. '제이슨이었으면 이렇게 안 했을 텐데… 뭔가 매끄럽지 않아…'

화려한 오프닝 음악공연과 좌중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아트서커스 공연이 끝나자 제이슨은 장난기 가득한 멘트로 '마치 대관식에서 왕을 소개하듯' 한껏 과장되게 윌리엄을 무대로 불러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프린지와 함께 한 산 증인이자 어셈블리의 극장장인 윌리엄은 이 때 6~7장의 A4용지를 팔랑이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

매년 같은 패턴이다. 윌리엄은 예쁘게 정리한 큐카드를 들고 오는 법이 없다. 저녁시간 내내 들고 있었던 듯 구김이 있는 A4용지 여러 장을 펼쳐진 상태 그대로 들고 나와 특유의 빠른 말투로 읽어 나간다.

"나는 이 축제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이벤트라 생각한다. 이 도시는 영감 그 자체다... (I think this is the most extraordinary event in the world. City itself is nothing but inspiring...)"

언제나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윌리엄의 문체는 사람들 귀에 친한 친구의 이야기처럼 편안하게 들려온다.

축제도시에 보내는 찬사와 감사에 이어, 그는 어셈블리 라인업에 대해 소개하고 쟝르별 주목해야 할 공연과 몇 년 만에 돌아온 반가운 프로덕션의 신작을 소개한다.

객석에 앉아 있는 기자들은 어셈블리에서 배포하는 보도자료에 이미 첨부된 내용일 수도 있는 윌리엄의 설명을 중간중간 받아 적는다.

윌리엄은 가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한다.

브렉시트 그래픽. 에이투비즈 제공

"좀 전에 누군가 브렉시트에 대해 물어왔다… 우리는 이 나라에 전 세계 사람들이 오기를 독려하며, 이 문화로 가득한 세계에서 서로의 관심을 나눈다. 우리는 명확히 당신이 이 축제에 오기를 원한다. (Somebody asked about the Brexit earlier... we encourage and bring international people to come into this country and share our interests in this cultural world. We certainly Do want you at this festival.)"

객석에 있는 모두는 큰 박수와 응원의 목소리로 동의와 지지의 뜻을 밝힌다.

오프닝 갈라는 다른 공연에 비해 이동이 매우 자유롭다. 공연장 통로를 가득 메운 언론사의 촬영장비와 카메라를 비롯해 천여명의 관객들은 하이라이트 공연의 중간중간에 들락날락을 반복하지만 윌리엄이 스피치하는 10여분동안에는 모두 자리를 지킨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때론 공감하고 때론 감사의 뜻을 표하며 끈끈한 쌍방향 대화처럼 인사말이 이어진다.

"정말 너무 많은 공연들이 있지만… 나는 우리의 제4회 코리안시즌을 환영한다는 말을 반드시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엔젤라 권의 노고에 감사한다. (There are far too many shows... However, I have to welcome back our 4th Korean Season, Thanks to Angella Kwon for all her hard work on this.)"

윌리엄은 잊지 않고 매년 '코리안 시즌'에 대해 언급한다. 내 이름이 불리자 객석에 있던 몇몇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호응했고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숨겼다.

그의 공식 인사는 어셈블리에서 일하는 스텝들에 대한 감사로 마무리되었다.

모두를 위한 축제는 서로의 벽을 허물고, 지구온난화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담아내며, 각기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 각자의 삶에 대한 질문과 해법을 다룬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세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해해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성장했고, 그 성장이 멈추지 않길 기도한다.

2020년 4월, '축제 공식 취소'라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도쿄올림픽이 취소되고, 유럽에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그해 2월에 '제6회 코리안 시즌'의 최종 선정을 마쳤던 우리는 공연의 준비기간이 일년 더 늘어난거잖아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글을 쓰고 있는 2021년 3월도 세계적인 팬데믹은 현재진행형이다.

글 : 권은정 자문위원

<끝> 상단 문화에 들어가시면 상, 중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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