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정의 축제이야기] 내 인생의 선물, 페스티벌 - 힘든 경험에도 후회는 없어 (中)

에든버러 대화의 단골 주제가 된 '공연장 운영 실패'

공연 회의 중인 권은정 자문위원. 에이투비즈 제공

2013년 8월, 어셈블리 무대 예술 감독인 윌리엄과 나는 프레데릭 스트리트(Frederick St.)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 '카페 루즈(The Café Rouge)'에서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매년 같은 패턴으로 이어진다.

전년도 축제가 끝난 9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각자 뭘 했는지 일반적인 근황을 묻고 답한다.

이어서 그 해 선정된 공연에 대한 의견과 '꼭 봐야 할 공연 (Must-See)' 리스트를 공유하고는 '올해는 누가 언제 온다고 했고, 누구는 안타깝게 못 올 것 같다'는 친구들의 에든버러 방문일정에 대한 정보를 나눈다.

하지만 이날은 평소와 다른 대화가 이어졌다.

2010년 8월의 윌리엄은 '서울에서 공연장을 운영하겠다'는 나를 말리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같은 자리에서 '그 봐, 내가 뭐랬어…(See, I told you…)'로 시작하는 훈계와 힘들었을 친구를 달래는 위로의 말을 늘어놓게 되었다.

윌리엄은 런던의 리버사이드 스튜디오(Riverside Studios)공연장을 1993년부터 운영해 온 극장장 선배(?)였다.

에든버러 축제. 에이투비즈 제공

서울에 전용관을 오픈하기 전, 나는 인생 선배이자 극장장 선배인 윌리엄에게 공연장 운영 관련 고민되는 몇 가지를 상의하고 있었다.

우리말로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릴' 기세로 윌리엄은 나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공연장이라는 게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나오기 힘들어. '어떤 공연장이다'하는 네임 밸류를 쌓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리고 신경 쓸 게 한두가지가 아니야.

어떤 날은 예상치도 않은 화장실 관련 컴플레인까지 듣게 된다구. 매입매출을 맞추고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것도 머리가 아픈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공연장의 특성상 민원거리가 되지 않는 것에서도 민원이 발생하기 일쑤고, 해결해야 하는 일은 매일 산재되어 있어."

그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부정적인 예를 들었다.

당시에 나는 '윌리엄이 나를 참 많이도 걱정해 주는구나…'라고 고맙게 생각하며 기분 좋게 얘기를 듣고 있었을 뿐, 이미 결정한 바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나만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나는 남의 말을 귀 담아 듣는 편이다. 진심으로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집은 세다.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남들이 말린다고 그만두지 않는다.

우선 계획한 바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직접 경험한 이후에 친구들에게 묻는다.

"왜 말리지 않았어?" 그러면 친구들은 진심으로 어이없어 한다. 다들 자신들이 얼마나 말렸었는지 답답한 듯 얘기하지만 내 기억과는 많이 다르다.

아마도 이들은 자신의 반대의견을 침착하게 조곤조곤 설명했을 것이다.

그건 나에게 '하나의 의견'으로 기억될 뿐, 나는 왜 나에게 '하지마!' 라고 확실하게 얘기하지 않았는지 묻곤 한다.

결국 서로 하는 얘기는 매번 같아서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가 된다.

이 날의 나와 윌리엄도 돌림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지 말랬잖아…'라고 시작하는 윌리엄과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을 말한 거잖아'라고 말하는 나의 돌고 돌아도 답 없는 대화.

나는 지난 3년간 수십 번 윌리엄의 말을 곱씹었다.

공연장을 운영하겠다는 나를 말린 건 윌리엄만은 아니었고, '말릴 때 하지 말껄…'하는 후회도 수백 번 들었다.

정말 쓸데없는 얘기지만, 별의 별 생각을 다 했었다.

코리안 시즌 배너가 붙은 버스. 에이투비즈 제공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문장에 희망을 갖고 '전용관을 갖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던 나의 간절한 기도를 우주의 기운이 모여 들어주긴 들어준 것 같은데, '망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거나 '수익을 내며 안정적으로 오래 운영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의 뒤늦은 후회 같은 곱씹음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공연장 얘기만 하면 시니컬해지는 나의 웃기지 않은 표현이 이렇다는 것이고 운영을 위해서는 후회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기억만 더 크게 남아있다.

공연장 운영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용관이니 우리 공연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다. 월 임대료만 5천만원이다.

공과금을 합치면 6천. 배우, 스텝, 직원 50여명의 월급날은 매달 빠르게 돌아왔다. 공간을 쉼없이 활용하여 매출을 발생시키기 위한 많은 대안을 기획했다.

공연예술을 가미한 리더십 프로그램도 기획해 운영했고 일반인을 위한 백스테이지 투어와 청소년을 위한 전문가들의 강연,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공연이 없는 시간에는 창간식, 기자간담회, 리셉션 등 대관도 진행했다.

KBS 한류매거진 창간식,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오프닝, 안철수 대선출마선언, '개그콘서트' 서수민PD와 '남극의 눈물' 김진만 피디의 강연 등.

인터뷰 중인 권은정 자문위원. 에이투비즈 제공

그러나 주변환경은 시간이 갈수록 더없이 열악해졌다.

2000년 전용관을 오픈한 난타의 관객은 해가 갈수록 외국인 비중이 높아져 갔다.

여행사와 협약을 맺고 관광상품안에 포함된 전용관 공연은 공연시장이 아닌 관광시장에 속해 있었다.

난타의 뒤를 이은 전용관 공연은 17개로 늘어났고 어느 순간부터 출혈경쟁이 시작되었다.

전용관은 300석이하의 공연장에 4~5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공연이 대다수였고 하루에 많게는 3~4회까지 공연을 진행하고 있었다.

중국과 동남아의 단체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이 공연들은 서로의 살을 깎고 깎아 어느 새 3천원, 4천원을 받으며 여행사에 공연을 팔았다.

출연료도 감당이 안될 공연비다. 공연장 임대료에, 기술장비 비용에, 배우들 출연료에, 홍보마케팅 비용에 기술스텝, 티켓마스터, 하우스 스텝 인건비와 운영비에, 직원들 급여에, 공과금까지…

당시 그들은 누구를 위한 출혈경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외국인들이 어쩌면 평생 한번 볼까 말까 한 한국공연이 고급스럽길 바랬다.

한 개인의 욕심이었다. 90년대 초반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해외를 다니며 본 우리나라의 입지를 나는 늘 일본과 비교했다.

일본 레스토랑은 'Dining out'하러 가는 곳이고 데이트를 할 때 상대를 데려갈 수 있는 펜시하고 멋진 곳인 반면 한국 식당은 어쩌다 알게 된 한국친구를 통해 소개를 받아서 가보니 음식은 너무 맛있으나 분위기는 데이트 코스로 정할 수 없는 이미지로 자리잡아 있었다.

일본의 공연은 (보면서 이해를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뭔가 의식이 있고 스피리츄얼하며 고급스럽다는 평을 받고 있었고 한국의 공연은 '너희 나라도 공연을 만들어?'라는 질문을 받아야 했던 그 시절

한국의 고급문화를 알리고 싶다는 목표로 제작한 나의 명품 퍼포먼스를 나는 출혈경쟁시장에 내놓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고급화 전략으로 밀어붙여보자는 치기어린 노력은 얼마 가지 않아 보기 좋게 실패했다.

BBC Afternoon show에 출연한 권은정 자문위원. 에이투비즈 제공

여행사 입장에서는 관광상품의 단가를 낮추는 게 당연히 유리하다. 길어야 1시간~1시간반을 차지하는 문화상품을 일부러 더 비싼 공연으로 채울 이유가 이들에겐 없다.

이 당연한 사업적 판단이 나에겐 작품의 규모와 퀄리티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느껴졌다. 이에 더해, 이웃나라들과 우리의 외교관계는 점점 악화되어져만 갔다.

고급화 전략으로 개별관광객(FIT/Foreign Independent Tour) 유치에 집중하던 시기에 일본의 혐한 감정은 더욱 팽배해졌고, 사드 배치로 중국관광객도 급감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을 한다. 전용관 사업을 결심한 이유가 '함께 하는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가고, 하나 둘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안정적인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니...

해외공연은 겉보기에 좋을 뿐 한 가정의 가장이 생계를 책임질 만큼의 안정된 수입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의도가 나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쁜 결정이었다. 사업가적인 생각과 그에 따른 판단없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유로 수십억을 투자하다니...

회사는 폐업의 수순을 밟았고 나는 수십명의 배우, 스텝, 직원들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아픔을 경험하게 한 사람이 되었다.

공연장은 나에게 판단에 대한 후회와 엄마를 잃은 기억과 70년대 후반 엄마 손잡고 처음 만든 첫 통장을 없애게 한 곳으로 기억되어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공연장 주변으로 다니지 않았다.

세상에 오는 순서도 가는 순서도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하지만 나는 어느새 흰 머리와 흰 수염이 가득해진 친구와 브런치를 먹으며 그리움과 죽음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윌리엄과의 공연장이야기는 지극히 객관적인 한국의 외교상황과 산업적 구조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지었다.

글 : 권은정 에이투비즈 대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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