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무대를 준비하는 중세도시의 현대 마법사들!

어셈블리룸스 의회회관. 에이투비즈 제공
에든버러 퀸 스트리트의 숙소에서 공연장이 있는 조지 스트리트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나치는 건물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조금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길을 건너려고 보니,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 노란불이 깜빡이는 동그란 전구가 달린 검은 기둥이 서 있었다.

이렇게 노란 전구가 깜빡이는 건널목을 영국사람들은 '지브라 크로싱(Zebra Crossing, 얼룩말 횡단보도)'이라고 부르며 이곳에서는 차량이 오는 지 확인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건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횡단보도는 '무조건 보행자 우선'이며 차량은 '우선멈춤'을 지켜야 한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어린이 보호구역의 건널목과 같다.

어셈블리룸스. 에이투비즈 제공
1787년에 완성된 죠지안 양식의 어셈블리룸스는 그리스 신전 같은 기둥 사이에 정문이 있다.

넓은 홀을 가로질러 들어가면 양쪽으로 계단이 있고 각각 반층정도 올라갔다가 다시 1F과 G층(우리의 1층이 영국의 0층/Ground floor이다)으로 갈 수 있도록 계단이 나뉘어진다.

계단을 내려가면 양쪽 모두 로즈 스트리트(Rose St.)로 나가는 문이 나오고 1F으로 올라가면 6개의 공연장이 나온다.

거대한 샹들리에는 어셈블리룸스의 시그니처와도 같았다. 350석규모의 볼룸(Ballroom)과 650석규모의 뮤직홀, 그리고 내가 에든버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레인바(Lane bar)에도 수백개의 크리스탈이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있었다.

일년에 한달만 공연장으로 사용되는 이 공간들은 건물의 특징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섬세하게 설계된다.

볼룸과 뮤직홀의 샹들리에는 객석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되었고 축제기간동안 하우스라이트로 사용되었다.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고 정문에서 곧바로 직진하면 레인바가 나온다.

낮고 푹신한 2~3인용 가죽소파와 1인용 벨벳소파, 낮고 넓은 테이블이 바를 제외한 3면에 자리해 있고 그 사이사이로 디자인은 모두 다르지만 레인바의 클래식한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나무테이블과 의자들이 들어서 있었다.

푹신한 레드카펫과 검은 스타인웨이 피아노, 툭툭 내려놓은 듯한 높고 낮은 스탠드 조명과 거대한 샹들리에가 한낮에도 한밤중의 재즈바에 앉아 있는 듯한 나른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레인바는 어셈블리에서 일하는 스텝들과 공연자들이 하루의 시작과 끝을 보내는 곳이었다.

공연 협의 중인 권은정 자문위원. 에이투비즈 제공
카푸치노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정을 정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공연이 끝나면 공연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모두의 아지트. 친구들과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아도 하루에 수차례 마주치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잘가(Good-bye)'가 아닌 '이따 봐(See you later, 친한 친구에게는 'later'만 사용하기도 한다)라고 인사했다.

'Good-morning'으로 시작되는 우리의 인사는 공연 전 건네는 '공연 잘해(Have a good show)', 공연 후 건네는 '공연 어땠어?(How was your show?)'로 이어지며 축제의 모든 하루를 함께 했다.

축제의 공식질문과도 같은 '추천해 줄 공연 있어?(Any shows to recommend?)', '가장 좋았던 공연은 뭐야?(What's your favorite show?)'와 함께 이어지는 길고 짧은 개인적인 이야기는 우리를 동료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가족으로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인생에 소중한 사람들로 만들어 갔다.

에든버러에 오기전, 한국과 뉴욕에서 이메일과 유선통화로 공연관련 협의를 나누던 마크가 어셈블리룸스 정문으로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몇 개월간 얼굴을 모른 체 소통한 공연장 스텝들을 처음 대면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기술감독인 마크는 뉴질랜드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잘 생겼다고 해야 할지 예쁘다고 해야 할지 고민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다갈색 곱슬머리와 긴 속눈썹을 가진 인형 같은 눈은 르네상스시대의 명화에 자주 등장하는 아기천사 같았고 잘생긴 코와 날렵한 턱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도톰한 입술은 항상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반나절만 지나도 수북히 자라는 수염이 없었다면 미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마크는 매사에 긍정적이었고,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어떤 요청을 하든 'No'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 (Let's find a way to do it)'라고 말하는 그를 우리는 신뢰했고 존중했다.

우리가 한달간 공연한 어셈블리룸스의 볼룸(직역하면, '의회회관의 무도회장')은 고풍스러운 죠지안 양식으로 지어져 빈틈없이 화려했다.

프로시니엄 극장으로 변신하기 위해 아름다운 벽면과 천장의 데코는 안타깝게도 검은 천으로 꼼꼼히 가려져야 했고 객석 등으로 사용하는 눈부신 샹들리에만이 이 공간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고 있었다.

운송회사의 컨테이너는 공연장과 협의한 반입시간에 정확히 도착했고 전문 스텝들의 도움으로 공연준비는 순조로웠다.

에든버러 축제. 에이투비즈 제공
에든버러 축제는 8월 한달만 진행되기 때문에 프로그래머와 행정을 담당하는 치프(Chief)를 제외한 마케팅, 기술, 공연장운영 파트의 인력은 각각 필요한 시기에 투입되었다.

어셈블리의 예술감독인 윌리엄은 런던의 리버사이드 스튜디오에서 업무를 보다가
축제기간에만 에든버러로 올라왔고 홍보마케팅 담당은 에든버러나 글래스고 등지의 스코틀랜드 출신이 맡을 때가 많았다.

기술파트는 윌리엄과 형제처럼 지내는 마크의 영향인지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온 친구들이 가장 많았고 간혹 유럽의 축제를 돌며 스텝으로 일하는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친구들이 함께 했다.

나에겐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다.

삼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생존을 위해 어느 순간 체득되었을 지도 모를 능력. 나는 '권유형' 문장을 자주 사용한다.

일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은 '이렇게 할까?(Should we…?/Shall we…?)' 또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Why don't we…?)'이다.

언뜻 나도 함께 일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시간효율을 고려해 나는 권유형으로 각 담당 스텝(Staff)에게 일을 맡긴 후 다음 스텝(Step)을 준비하거나 타 부서와의 협의를 진행하러 이동한다.

일을 하며 터득한 또 하나의 기술은 '질문하기'이다.

담당자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게 하면 그 일은 '누가 시킨 일'이 아닌 '자신이 생각해 낸 주체적인 일'이 된다.

당시 공연의 무대감독이자 기술감독이자 연출부이자 해외투어 담당이었던 나는 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스킬로 '타협과 칭찬'을 선택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부분에 꽤나 소질이 있었다.

진심을 담은 하이톤으로 '넌 정말 대단해!(You're amazing!)'이라는 마법의 단어를 말하면 모두 기분좋게 업무의 능률을 올릴 수 있었으니 행복한 '윈윈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글 : 권은정 에이투비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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